베트남 2008 여행

땀꼭 찍고 하롱만까지

정안군 2008. 2. 29. 10:10

 

2월 23일 토요일


이번 여행에서 실수한 것이 시계를 빼놓고 온 것.  


핸드폰이 잘나가는 제품이 아니라서 로밍 서비스도 안 되고 그나마 시계도 없어 그냥 왔더니 새벽에 도통 시간을 모르겠으니 원.


우리나라 시간과 비교하면 2시간이 빠르니 아무리 게을러도 서쪽으로 오면 당근 그 나라 시간으로 일찍 일어나게 되어있다.


잠도 안 오고 밖도 밝아져 호텔 근처나 산책하려고 카메라를 들고 나온다.


로비에 와서 시간을 보니 7시도 안된 시간.


하지만 몸뚱이는 한국 시간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9시가 다된 시간까지 누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 당연할 테고.

 

하룻밤 신세진 SPORT 호텔


호텔 밖은 뭐랄까 중국 변방 지방의 분위기랄까 묘한 분위기이다.

 

호텔 밖 거리 풍경


쌀 국수 퍼(PHO)를 먹는 사람들이 있고 오토바이 택시도 사람을 기다리는데 뭔가 나사가 풀린듯한 분위기.


나도 한 그릇 사먹고 싶지만 돈도 없으니.

호텔이 있는 길의 이름 르반티엠인가?   로마자 위 표시는 성조인데 베트남어는 6개가 있다고. 


이번 여행에서는 우리나라 돈만 가지고 왔고 달러는 한 푼도 가져오질 않았다.

 

왜냐고라?   돈 쓰기 싫어서.

 

PHO는 쌀국수, BO는 소를 뜻하니 PHO BO는 쇠고기 국수 그리고 COM은 밥이다. 

 

 호텔 앞 대학 여학생 기숙사란다.

 

다시 방에 올라서 동료들과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는다.


뷔페 스타일인데 가지 수도 많지 않고 맛이 그저 그렇다.


비행기 값 정도인 패키지 가격에 그 정도 밖에는 계산이 나오질 않을 테니 뭐 그냥 먹어 두는 수밖에.


식사를 끝내고 약속된 9시에 밖에 나와 버스를 탄다.


오늘은 일정이 좀 길다.


원래 마지막 날인 월요일에 호치민 묘 참관이 계획되어 있는데 그 날은 쉬는 날이라서 오늘 그 일대를 구경하고 하노이에서 남쪽으로 2시간 거리인 땀꼭을 방문한 후 5시간 반 정도 이동하여 하롱베이까지 간단다.


차 원 없이 타게 생겼다.

 

길을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 그래도 헬맷은 모두 썼다.

 

우선 호치민 묘로.


호치민은 혁명을 말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영웅이다.

 

 호치민 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그는 죽어서 시체도 남겼다.


죽어서 시체를 남긴 동무들은 레닌, 마오쩌뚱(모택동), 북의 김일성과 호치민인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두 사회주의 나라 사람들이다.


혹 모르겠다 쿠바의 카스트로도 남길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거든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정말 잘 하는 것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앞서지만.


뭔가 그들도 생각이 있겠지 이 정도로 정리.


오전에만 개방하는 탓에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

 

줄을 서고 기다리는데 가방이나 카메라 모두 맡겨야 된다고.

 

해서 사진은 없고 나와서 다시 찍을 수가 있었다.


줄은 길었지만 빨리 진행되어 그다지 지루하지 않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면서 감시병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진다.


떠들어도 안 되고 뒷짐을 져도 안 되며 오랜 시간 멈추어 있어도 안 된단다.


팔짱은 어떤지 일부러 해보니 팔짱은 괜찮은지 뭐라는 놈들은 없다.


일부로 팔짱을 끼고 관이 놓여져 있는 방을 돌아 나온다.


살아 있을 때 멋있게 행동하던 호치민은 존경하지만 마치 밀랍 인형처럼 누워있는 호치민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호치민 본인도 원하던 바가 아니라고 했단다.


통일된 나라를 보지 못하고 죽는데 통일이 되면 자기를 화장한 재를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 나누어 묻고 그 앞에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도록 의자나 마련해 두라고 했다고.


이런 멋쟁이를 그 뒤 똘마니들은 자기 권력을 강화하는데 호치민의 시체를 이용한 셈.


부정부패 지수가 세계 일 이등을 다투는 나라가 되었으니..


아마도 호치민이 살아난다면 이런 꼴 보기 싫으니 제발 좀 흙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지 않을까?


이 나라도 엄청난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고.


그러는 중에 빈부 격차와 부패는 갈 길이 먼 베트남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인데 아마 강인하고 슬기로운 민족이니 만큼 모든 것을 잘 이겨내리라 믿어본다.


이 근처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힘 센 기관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란다.


다음은 프랑스 식민지 총독이 살 던 주거지와 호치민이 집무하던 사무실 등을 돌면서 구경하도록 되어 있다.

 

사회주의 공화국 창립을 선언했던 바딘 광장

 

과거 총독 관저, 현 영빈관

 

호치민 사무실 - 프랑스 식민지 시절 기술자 숙소였단다.

 

호치민 사무실

 

호치민 집무실 및 숙소

 

 그 실내

 

 마찬가지로 실내

 

금붕어도 구경거리 


검소하고 또 검소했다는 호치민.   구경 온 사람은 정말 엄청났다.


이런 인물을 가진 베트남.   참 멋지다.


그 다음은 호치민 박물관인데 잘 알다시피 워낙 검소한 사람이고 전쟁 시절이니  뭐 크게 남긴 것이 있으랴.


거의 사진과 호치민 관련 문서와 편지였다.


여기서 지식이 짧음과 시간 부족에 아쉬움이.


파리 협정에 서명한 만년필과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대통령궁을 밀고 들어갈 때 부서진 철문과 남베트남 깃발이 인상에 남는다.


남베트남 깃발은 박스컵 그 후 한 동안 인기 있던 대통령배 컵 축구 대회 단골이었던 베트남을 상징하던 것이라서 눈에 익다.


우리나라의 밥이었지 아마?


그렇지만 그 때 우리나라보다 좀 나았던 버마나 말레이시아가 지금은 우리나라 상대조차 안 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축구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치민 어록 -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우리 민족의 자유 등등...

 

호치민과 그 동료들 사진

 

 1978년 중국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군이 획득한 중국 측 국경 경계석

 

호치만 루트를 통해 물자를 나르던 자전거

 

 파리 협정에 사용된 만년필

 

남베트남 국기와 패망 때 부서진 철문 

 

기억에도 새로운 남베트남 국기 

 

잠깐 베트남 최고의 유물이라는 일주사 건물 앞에서 휴식...

 기둥 하나에 세워진 절 - 일주사

 

 호치민 박물관

 

날이 꽤 더운데 겨울 옷을 입고 다니고 있으니 원... 그래도 추운 것보다야..


잠시 휴식을 취하고 버스로 이동한다.


정말 오토바이 천국인 베트남 거리는 한마디로 정신이 없다.


먼 거리도 아닌데 단속 경찰과 오토바이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로 제 속도를 내지 못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데 거리를 달려보니 실감이 난다.


허나 오늘은 날도 많이 뜨겁지 않아 자전거 여행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언젠가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자전거 여행할 날을 기대해 본다.


대략 1500Km라는데...   넉넉잡고 20일이면 되겠고...


중간 고속도로를 달린다.


고속도로라고 해도 길만 2차선이 4차선이 된 형태고 달리는 종류는 비슷하다.


톨게이트는 한 100 m 쯤 앞에 미리 매표소가 있는데 아마도 삥땅을 막고 직업을 창출(?)하기 위한 방안인 모양.


그러니까 미리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본 톨게이트에서 그 표를 내는 형태.


우리 2Mb 아자씨는 운하 판다는 말만 하지 말고 어떻게 직업을 만들어 내는지 와서 배우라.


직업은 나누어야 만들어 지는 법.


그러니까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인간 말종(표준어는 망종이란다.  다시 쓰면 인간 망종)만 만들어내지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지 못함을 미국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하긴 이 오륀지 아줌마나 2Mb나 보이는 게 미국뿐인데 다른 게 보이겠어?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비포장 둑길을 달린다.   오른쪽으로는 중국 계림을 상징하는 모습의 석회석 산 형태가 보이고.

 

 땀꼭 1

 

 땀꼭 2


땀꼭은 논 위의 계림이라고 하는 관광지인데 논이라기보다는 늪지가 맞겠다.


확인해보니 Ngo Dong강이라누만... 뭐라 읽는지는 나도 잘..


일단 점심을 먹고.


식당 건물은 거창한데 우리가 지불한 돈이 얼마 안 되는지 개밥 수준이다.

 

 건물 앞 태호석


한국 관광객 전용 식당인데 뭐 따로 와서 돈을 더 내면 당연 괜찮은 음식이 나오겠지.


점심을 마치고 가이드가 준비해준 논이라는 이른바 베트콩 모자를 받아 들고 배 타러 간다.


물은 그다지 깊지 않고 안에 물풀이 많아 깨끗한 편.


베트남 아낙네가 노를 저어 동굴이 있다는 곳으로 출발.

 

왕복 1시간의 여정이다.


땀꼭은 3개의 동굴이라는 뜻이라고.


잘만 관리해 놓으면 좋은 곳인데 우리처럼 이들로 관광 마인드를 많이 부족하다.


실실 배저어가면 큰 동굴이 나온다.


우리 단양이나 영월 지방의 석회석 지대처럼 많은 동굴이 있는데 우리가 온 동굴의 규모가 제법 크다.


물건을 강매한다고 론리에 나와 있는데 그런 모습을 없다.


올 때는 우리 일행이 노를 대신 젓는다고 아줌씨와 바꾸더니 열심히 저어 일등으로 도착했다는 거..


만세!!

 

 

 

 

 

 

 

 

 

다음은 하롱만까지 가는 것이다.


거리는 180여 Km 정도라는데 길 사정 상 5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길가는 마을 어귀에 공동묘지도 보이고 협괘 철도로 가끔 기차도 지나간다.

 

 

 

 

 길가 공동 묘지 - 아주 마을을 이뤘구만.


겉으로는 한가로운 모습인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통일되었을 때에는 사회주의, 그리고 이것이 실패하면서 도이모이 정책으로 개방과 자본주의 체재로 변환되었는데 이에 적응하느냐 힘들게 살고 있을 것이다.

 


길가는 간혹 기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모습이 보이지만 대개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편인가 보다.


양 쪽으로 넓은 평지인 지형을 오랫동안 달린다.


베트남은 대표적 농경지가 하노이 부근의 홍강이 만들어 낸 충적평야와 메콩이 만든 호치민 아래 삼각주 부분.


이곳에서 많은 쌀을 생산해 내어 3대 쌀 수출국이란다.


지금은 가격이 별 수 없지만 아마 머지않아 식량이 무기화되면 우리나라도 이 나라에 애걸복걸하며 매달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정부가 농업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식량 자원에 대한 대책은 서 있는지 한심할 때가 많다.


농업에서 일정 부분의 인구를 잡아주어야 하는데 농업이 파산되니 그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자영업에 나서고 그 결과 자영업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아 서민 경제가 살아나질 못하는 점이 있다.


너무 높은 자영업 비율로 비정상적인 경쟁 관계로 산업 구조가 왜곡되어 있는데 그저 장사가 안 되어 살기 어렵다고만 하니.


하긴 뭔 걱정인가?


우리 2 Mb가 있는데.


지루하게 달리다가 휴게소에서 쉰단다.

 

 휴게소

 

패키지 뻔한 각본이지만 이 휴게소는 한국 관광객 전용이다.


매장이 있고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아가씨들은 유창한 한국말로 손님 끌기 바쁘다.


이렇게 말이란 아쉬운 놈이 먼저 배우게 되어 있지.


영어 타령만 하는 강남 아저씨 아줌마들은 자기네들을 특권층화하려고 정책적으로 그러는데 동네방네 모두 나서서 난리들을 떨고 있으니 원.


영어만 잘하면 뭐하나 팔아먹을 문화나 물건이 없는데.


문화도 그 나라 경제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남 나라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 모르남.


결국 한류도 우리나라 경제력이 올라가서 생겼지 경제력이 처지면 세계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질 않는 법.


잠시 길가에 가서 차량과 오토바이가 뒤섞여 다리는 모습을 보니 약동하는 베트남인지 질주하는 베트남의 모습인지 정신이 없다.


이 도로는 하노이에서 하이퐁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인데 하이퐁은 존슨 대통령 시절 북베트남 폭격의 구실을 삼았던 이른바 통킹만 사건의 통킹만에 접한 항구 도시이다.


현대사의 무대가 되었던 곳.


북베트남 폭격은 미군의 전면적인 참전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전쟁에 져서 수렁이라는 유명한 단어를 탄생시켰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려 지금은 이라크에서 수렁에 빠진 중..


하여튼 미국이란 나라도 연구 대상이다.


하이퐁을 지나면서 날은 어두워져 해안을 달리는 느낌만 전해진다.


또 간이 휴게소..

휴게소의 야자와 그 집 꼬마

 

 야자에 담긴 술 - 맛은?   글쎄올시다.


이곳에서 감처럼 생긴 과일을 다시 만난다.

 

그전 땡감 맛에 놀랐던 것인데 말랑말랑해 진 것을 먹어야 되는 것을 모르고 딱딱한 놈을 샀다가 그냥 버렸던 추억의 주인공.


열대 과일이 처음인 우리 일행들은 호기심이 많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은 겨울이라서 그다지 맛도 없고 종류도 별로.


차를 타자 가이드는 돈벌이 작업에 들어간다.


옵션을 많이 만들어 주고 몽땅 더하면 150 달러쯤 되는데 전체가 선택하면 100달러로 해준다나.


우리 팀 대장에게 그 선택 사항에서 몇 개를 빼고 말고 하지 말고 그 돈을 좀 깎으라고 했다.


아마도 서울 여행사에서 돈도 없이 우리를 넘겨받았을 테고 우리가 선택 관광을 하고 물건을 많이 사줘야 이 가이드도 먹고 사니 괜히 몇 푼 아끼려다 분위기만 험악해진다고.


돈벌이가 결정이 되니 가이드도 활력이 솟는가보다.


15일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팀을 이끌고 다닌다는데.


호텔에 도착한다.


어제 호텔보다는 시설이 훨 낫다.


집을 맡기고 바로 내려와 저녁 식사하러 하롱시 중심가 쯤 되는 곳의 한국 식당에 간다.

오늘 저녁 메뉴는 삼겹살.

너무 기대를 안했더니 그 수준에 딱 맞는다.


식당 앞은 베트남 장사꾼들이 나서서 한 푼이라도 벌려고 난리.


여기서 패가 갈려 우리 팀은 맥주를 더 먹는다고 남고 부부 일행은 호텔로 돌아오다 한 부부 팀은 다른 호텔 카지노로 가고 결국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교장선생님 부부와 나만 호텔에 돌아오게 되었다.


컨디션이 좋질 않아서 일찍 들어왔는데 나중 들어온 우리 일행들이 단체 행동에서 이탈했다고 뭐라 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장면인데.


그냥 만사가 귀찮아 한 귀로 흘리고 만다.


TV는 엘쥐인데 내용물은 엉망... 그나마 볼만한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화면 상태가 영 불량.


뭔가 아직은 어설픈 곳이 많은 나라답게 TV로 그랬다.

 

뱀다리) 중국-베트남 전쟁


중국-베트남 전쟁은 1978년에 중국군의 침공으로 발발한 전쟁입니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은 베트남이 캄보디아와의 국경분쟁이 한창일 때 중국 화교들을 내쫒은 것에대한 보복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건 핑게이고 통일된 후 건방지게 나오는 놈 손 좀 봐줘야 되겠다가 속셈이었겠죠.

  

 당시 베트남은 캄보디아와의 분쟁 때문에 주력 전투부대들을 대부분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에 배치해 놓은 상태였고,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입은 막대한 국력 손실이 거의 회복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중국군은 63식 전차 수백대와 5개 사단과 각종 지원부대를 합쳐 10만의 병력으로 베트남을 침공하는데, 처음에는 베트남 북부의 몇몇 군사적 요충지를 점령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하노이 근처까지 진격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강한 베트남군의 저항에 중국군의 진격속도는 점점 더뎌지고 소도시 하나를 점령할 때 마다 베트남군이 입는 피해의 3~4배의 피해를 입습니다. 중국군이 자랑하던 63식 전차들도 베트남군의 AT-4 새거 미사일과 교묘한 대전차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파괴되고, 며칠만에 끝날 것으로 예상되던 전쟁은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상과는 달리 전쟁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중국군 지휘부는 10만 병력을 추가로 베트남에 파견하나 별 전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전투마다 베트남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베트남군은 몇몇 거점에서는 전멸 상황까지 가면서도 항전하면서, 전략적 철수를 병행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중국군에게 가능한 한 많은 손실을 강요하면서, 지탱할 수 없을 때에는 퇴각하는 방법이었습니다.

 

 1978년 3월 3일 국경선으로 부터 30Km 거리를 어렵게 점령한 중국군은 사실상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징벌'을 달성하였다고 멋대로 성명을 발표하고 철수를 시작 합니다. 이에 베트남군도 휴전을 전합니다.

 

 1978년 3월 15일 중국군은 베트남을 침공한지 17일 만에 철수합니다. 그것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 베트남군의 주력은 대부분 캄보디아와의 국경 쪽으로 빠져있던 상태였습니다.

 

 종전후 중국은 베트남에 본때를 보여 준 승리라고 선전했으나 실상은 적군 주력을 끌어내지도 못했으면서도 졸전 끝에 불과 17일 만에 무려 2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낸 명백한 대패 였습니다. 많은 수의 보병과 대규모 물량의 전차, 그리고 포병을 투입했음에도 운용기술은 40~50년대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계급제 폐지로 인해 전투 현장의 통제 조차도 완전 엉망이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교조적인 혼란 속에서 군 현대화를 게을리한 결과 인력·장비 등 모든 면에서 중국군이 질적으로 형편없이 낙후됐음이 드러난 것이지요.

출처 : Tong - 노력 중이라우님의 밀리터리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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