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귀주 2010 여행

12. 중국 혁명사에 한 장면을 남긴 려평(黎平) 고성 1

정안군 2010. 9. 2. 10:32

태풍이 지나가나 봅니다.


이름이 곤파스.


Named By Japan이라는군요.


영어 '콤파스'를 의미한다고.


어느 나라든 남 나라 글자를 자기 나라 말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은 그래도 좀 낫겠죠?


그래서 서양 문화를 유입하던 시기에 일본이 번역한 한자체를 우리가 많이 수입을 했지요.


일본에 여행을 가보면 한자 표현이 어쩜 그리 같은지 놀랄 때가 있습니다.


지하철, 출입구, 일요일, 일주일 등등.


마치 복사판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체면이 서는 것은 그것을 우리는 한자가 아닌 한글로 표기했다는 거.


지금은 그냥 영어를 직수입해서 써버리지요.


그런데 중국도 그 작업이 쉽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영어 표현을 중국어로 옮긴 것을 보면 같은 한자 문화권인 우리도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맥도날드 같은 거나 코카콜라 등.


하여튼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그나저나 올라오는 태풍은 피해를 주지 말고 조용히 지나가주면 좋겠네요.



2010년 8월 8일 일요일


오늘이 말복이란다.


어제 긴 버스 여행 시간에 피곤했는데 목욕도 하고 안마도 받고 해서 숙면을 했다.


방안에 모기가 있어서 앵앵거리는 것 같았는데도 잠에 취해서 그냥 헌혈하고 말 정도로.


아침을 만두와 죽으로 대충 먹고 택시를 탄다.


옛날 고성 자리에 있다는, 홍군이 회의한 자리에 세워진 기념관으로.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택시를 탔는데 그냥 호텔 앞길을 쭉 가니 바로 기념관이 나온다.


한 500m나 되나?


그러니까 호텔을 뒤로 하고 터미널을 지나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서 그냥 똑바로 가면 나온다는.


기념관이 거창하게 서있는데 아직 개관을 안 한 듯 문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안 바에 의하면 출입구는 이쪽이 아니고 뒷쪽이다. 


해서 열기 전 동네 구경이나 한다고 双井街를 따라서 들어가려니 무슨 행사 준비 행렬인지 용을 들고 이동을 하는데 오늘이 뭔 날인가?

 

별 일 아닌 것 같아 그냥 보내고 우리는 길을 따라 걷는데.

 

 

 멀지 않은 곳에 왜 이 동네가 쌍 우물 거리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우물 2개가 나온다.

 

해서 쌍 우물 거리 雙井街. 

 

 

그 우물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중이라는 거.

 

 

골목을 지나 큰 길과 만나는 곳은 동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성가이다.

 

 

생각보다 구경거리가 쏠쏠하다.


유명세를 타지 않아서 그렇지 꽤 잘 보전해 놓았다.


정면으로 복음당이라는 십자가가 달린 건물이 보인다.

 

 

집사람은 오늘 일요일인데 예배를 드릴 수 있겠다고 좋아하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옛날 예배당 건물인 것은 맞지만 지금은 그 기능이 멈춘 듯.


복음관 문을 들어서면 건물 안 정원을 거쳐 홍군 회의지의 건물로 이어지는데 정원과 출입문이 예쁘다.

 

 

이 정원은 지나면 전시관.

 

이 건물 안에 그 때의 자료 사진이라든지 그 때 상황을 정리한 지도 같은 것이 정리되어 있었다.


주은래 전 수상이 묵었던 숙소도 있고.

 

현 공산당 총서기 후진타오도 1985년 7월부터 귀주성 공산당 서기로 일 했는데 그 때 이곳을 방문했던 모양. 

 

 

 

주덕과 수염을 기른 주은래의 모습.

 

당시 실세들이다.

 

 

박고와 이덕.

 

이들은 초기 공산당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들.

 

 

이 당시는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했던 모택동.

 

그래도 나중에 출세를 해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회의실이다.

 

 

그 당시 모습을 그림으로.

 

나중에 잘 될 줄 알았더라면 사진이라도 찍었을 텐데.

 

그 때는 도바리 신세이니. ㅎㅎ

 

자리도 없는 모택동이 중요한 임무나 있는 것처럼 뒤에서 폼을 잡고 있다.

 

그러니 어떻해...

 

화가도 먹고 살아야지.

 

 

여러가지로 참 감회가 새롭다.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었는데 그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이렇게 전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회의한 장소는 이 동네 지주나 성의 관리의 집이었을 것이고 홍군이 들어오자 꽁지 빠지게 도망가고 나서 빈 집을 이용하지 않았나 싶다.


건물들의 구조라든지 안의 장식을 보면 이 집 주인은 상당한 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혁명 시대 비운의 주인공인 陳雲의 흔적도 보이고.


3일 정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회의를 했던 것 같은데.


사실 이 당시는 모택동이 공산당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기 전이라서 모택동의 위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주석은 주덕이고 주은래가 중요한 인물이었다.


모택동은 遵義 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라는 우두머리 자리로 추천되어 등장하니 이 회의는 그 전의 회의처럼 보이는데.


遵義 회의가 1935년 1월이고 湘江 전투 후 공산당 서열이 나오는 것이 1934년 12월이니 그 사이에 열린 회의가 아닌 가 싶다.


江西省과 湖南省에서 활약하던 홍군은 장개석군의 맹공에 희생이 커지자 후퇴를 하게 되는데 그 옆인 귀주 땅 黎平으로 진출할 때에는 형세가 안정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해진 것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했을 것.


이런 패잔병 같은 부대가 결국 중국 본토를 석권하게 된다는.


더 찬찬히 읽어보고 싶어도 집사람이 관심이 없어 길거리 구경으로 나선다.

 

나서고 보니 뒷문으로 나와 앞문으로 나온 꼴이었다. 

 

 

현판 글씨는 진운의 솜씨이다.

 

 

그 앞거리는 옛날의 형태로 조성해 놓았다.

 

그 다음은 거대한 기념관 건물로..

 

건물은 거대하지만 내용물은 앞 회의지 내용의 복사판이다.

 

 

홍군이 호남성에서 퇴각한 뒤에 黎平으로 몰려올 때의 노선도이다.

 

 

홍군 장정도이고.

 

2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는.

 

 

집사람이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다.

 

감히 누구라고.

 

다행히 관리인이 없었다.

 

 

장정을 마치고 난 뒤 찍은 사진을 형상화한 듯.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주요 인물들이다.

 

 

뭐라고 쓴지는 몰라도 모택동 글씨라는 것은 알겠더라고.

 

붉은 것은 종이요, 금색은 글씨라.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집사람의 심기를 거스릴 수도 있는 문제.

 

해서 집사람이 좋아하는 거리 구경으로.


길거리에는 구석기 시대 이발소도 보이고.

 

 

영화 청나라 말기의 한 장면 같다.

 

사람과 벽에 쓰여 있는 중국 간자체만 빼고.

 

간자체는 필요에 의해 생기는 했겠지만 중국 한자의 멋이 풍겨나오지는 않는다는.

 

 

건물 지붕 위에는 선인장이 자란다.

 

미술 감각으로 그냥 둔 것인가 아님 귀찮아서 그런 것인지.

 

 

아라비아 글자도 멋이 있지만 중국 한자도 빠질 수 없는.

 

무식한 사람에게는 그냥 꼬부랑 글씨였을 테지만.

 

 

 

곳곳에 우물이 있다.

 

이곳에도 살아 숨 쉬는 생명이.

 

  

 

 

북문이던가?

 

성문이 남아 있더라는.

 

밑에서는 멋이 있는데 올라가면 실망한다.

 

*밭에 온통 쓰레기.

 

 

 

영화에서 나올 듯한 건물.

 

왠 건물인가 했더니.

 

 진운이 머물렀던 건물이라고. 

 

  

날이 점점 뜨거워져서 일단 호텔도 후퇴를 하는데 돌아오는 길이 시장 거리이다.

 

어디가나 중국은 사람이 많다.


그리고 먹을거리가 참 풍성하다.

 

 

푸주간..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중국인들.

 

 

 

모처럼 보는 석류.

 

맛은 네팔에서 먹던 것에 못 미치더라는.

 

 

이런 풍성한 먹을거리가 있었는데 많은 시절 굶어죽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으니.


그러니까 배만 부르게 하면 임금의 사명은 다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라의 말기 정치의 부재로 극심한 빈부의 격차에 시달리던 이 땅의 주인이자 손님이었던 농부들


자신이 농사지은 곡식을 모두 빼앗기고 배를 곯을 때 한 영웅이 일어나면 모두 나서서 그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니 이를 역성혁명이라고 하였느니.


하지만 그 이득을 취하는 자들은 얼마 안 되고 다시 농민들은 같은 상황으로 몰린다.


이런 것이 반복되어 중국의 한 역사를 만든 것인데, 모택동도 공산주의 전통 방식인 노동자를 세운 것이 아니고 이런 역성혁명의 전통을 살려 농민들을 기반으로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해서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은 이런 점에서 다른 것.


遵義 회의에서 이런 점을 내세운 모택동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국혁명은 그야말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비슷한 과정으로 들어갔던 것.


그러나 혁명의 주체들은 장정 시기와 일본과의 항쟁 시기에는 청렴하고 결백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권력의 주체도 등장하면서 자신들도 다른 제국의 권력자처럼 변하여 갔다.


이런 것을 바로잡고 순수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모택동은 홍위병을 일으켜 문화혁명으로 갔으니 그 혼란이 엄청 났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덧없다.


그들은 모두 이미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고.


그러나 그 뿌리는 남아 아직도 그들의 자녀들은 황제당이라하여 권력과 돈을 잡고 있지 않던가.


이제 혁명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버린 시대.


그 흘러간 노래를 힘차게 부르던 사람들을 오늘 만났지만 지금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 혁명가의 옛 노래는 관심이나 있을까?

 

오늘 이야기를 한 편으로 끝으로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네요.

 

오후 이야기는 다음으로 갑니다..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