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섬서 2014 여행

거친 땅, 거친 역사 섬서성을 찾아서 - 연안 延安 140520(중) 조원(枣园) 혁명 구지

정안군 2014. 6. 13. 10:39

이제 오늘 하루 머물 곳은 찾았습니다.


어제까지 돌아다닌 곳은 크게 말하면 섬서성 유림시 영역이었습니다.

유림시 정변현, 유림시, 유림시 미지현.

일단 유림시 영역은 호텔 체크인할 때 신분증에 대해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아서 섬서 모든 동네가 그런 가 했더니 그게 아니더군요.


동네가 바뀐 여기 섬서성 연안시는 신분증 검사가 엄격합니다.

그래서 연안시 영역은 다 그런가 했더니 또 시골에 가면 안 그렇더군요.

연안시 시내만 그런 듯합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여기만 외국인들이 좋은 호텔에서 지내도록 특별히 신경을 써주는지.


아무튼 호텔비는 220원인데 압금(押金)이라고 400원을 내놓으라더군요.

이 압금, 일종의 보증금인데 중국을 오래 여행하는 사람들이야 다 알겠지만 처음에는 첨 이해가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객잔이든 유스호스텔이든 이곳처럼 대주점이든 모두 보증금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 보증금은 호텔 방 안에 차려놓은 음식물이나 도구들, 그 외에 기물을 파손했을 때 정산하기 위해 받아 놓는 것 같던데, 컴퓨터 같은 물건을 파손시켰을 때에는 어차피 그 돈 가지고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방안에 콘돔 같은 성 기구도 차려져 있는 경우도 있던데, 나중에 퇴방할 때 객실 담당이 무전으로 카운터 아가씨에게 ‘이 아저씨 콘돔 특수형 2개 사용했수’라고 말할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경우 손님이 좀 ‘당항’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주변에 사람까지 있다면 더 거시기할 테고.


아이고, 뭐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요.




아무튼 방을 찾아서 가보니 보탑사가 바로 앞에 보일 정도로 전망도 좋고 또 방 시설도 좋습니다.

역시 돈이 좋긴 좋네요.


이제 연안을 느낄 시간입니다.



중심가의 도로 안내판에 나온 것처럼, 이 동네 가 볼 곳은 항대(抗大) 기념관, 봉황산(鳳凰山) 혁명 구지(舊址), 연안 혁명 기념관, 양가령(楊家岭) 혁명구지, 조원(枣园) 혁명구지, 연안 보탑산(寶塔山), 청량산(淸凉山) 혁명구지 정도로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호텔을 찾아 헤매는 통에 시간이 많이 지나서 오늘 다 방문하기는 힘들 것 같았어요.


선택과 집중.

그래, 오늘은 가장 대표적인 연안 혁명 기념관과 조원 혁명 구지만.


이렇게 마음을 먹고 시내버스 편으로 우선 시내에서 제일 멀리 있는 조원 혁명구지를 향해 출발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호남성에서 장정에 나선 홍군은 우여곡절 끝에 섬서성 오기(吳起)에 도착을 하여 장정을 마칩니다.


홍군 지도부는 오기에서 지금은 이름이 지단(志丹)으로 바뀐 보안(保安)으로 이동을 하여 거기서 잠시 머문 다음 연안으로 옮기

게 되는데 이때가 1943년이었다고 하지요?


이 무렵 서안사변으로 국공 합작이 이루어져, 홍군은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하는데, 이때 홍군은 세력을 엄청나게 불립니다.


적군 일본군만 보면 도망을 치고 만만한 게 홍어 뭐시기라고 죄 없는 백성들만 들들 볶던 장개석 군대에 비해, 홍군은 일본군과 많은 사상자를 내지면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치니 인심의 향방이 이때 결정이 된 것이지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택동 홍군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몇 차례 성과 없는 말잔치 공방을 주고받다가 드디어 국공 내전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와중인 1947년 지도부가 화북(華北)지방으로 이동하면서 연안은 그 임무를 다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연안은 혁명의 기운이 가장 세게 불 때 지도부가 머물렀던 도시입니다.


수많은 중국 청년들이 혁명과 항일의 상징 홍군에 뜻을 두고 이 연안으로 몰려들었고, 물론 그 중에는 조선 청년들도 많이 있었죠.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나오는 조선 청년 혁명가 김산(金山)도 그 중 한 명이었고요.

민족으로 보나 개인으로 보나 비극일 수밖에 없는 조국의 분단으로, 서로 적의 입장으로 바라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앞에 이들의 열정은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무정, 김두봉, 최창익.


북쪽 정권에 의해 연안파로 몰려 숙청된 이들도 어느 시기인가 조국 해방의 열정을 가지고 이 연안으로 왔을 겁니다.

그들이 거닐면서 조국의 해방을 기다리던 그 연안.

 땅을 내가 와서 있다는 것이 참 새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조원은 시내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혁명 구지 앞에는 대추나무 동산을 뜻하는 조원(枣园)이라는 이름답게 아이들 주먹 크기만 한 대추를 파는 장사꾼들로 복잡합니다.






혁명 성지와 대추 장사들.

뭔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홍군은 이들의 위해 혁명을 한 것이니 이들이 주인공이 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을 것 같고.


연안으로 와서 처음에는 양가령에서 잠시 머물던 지도부는 이곳 조원으로 와서 오랫동안 머물렀나 봅니다.

공식적으로는 1943년 10월부터 47년 3월까지라는군요.



이곳에 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군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도 사병들이 아니라 고급 간부들처럼 생긴 사람들로요.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는 어디에다 그 뿌리로 둘까요?

백선엽이나 박정희를 배출한 만주군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의 모태인가요?

공식적으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나라 국뻥부가 실질적으로 하는 짓을 보면 그렇지 않나요?




모택동과 그 지도부가 머물던 때도 주변 환경이 이랬을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 환경은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작은 산을 배경으로 하고 숲이 잘 가꾸어져 있는데, 그 숲 가운데 지도부가 머물렀던 동굴 집과 주택의 모습은 참 평화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카시아가 꽃피는 계절이라서 꽃이 활짝 피어 있는데, 이런 속에서 머문 사람들이 한창 벌어진 전쟁의 지도부라는 것이 뭔가 아이러니하더군요.












팽덕회, 류소기, 주은래 그리고 모택동의 거주지가 있었습니다.

몇 발짝만 옮기면 되는 그러니까 바로 옆에 서로의 집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들은 쉽게 서로 만나 같이 담배를 피면서 환담을 나누던 정말 가까운 동지이지 친구였겠지요?


그러나 1949년 홍군이 정권을 잡은 이들의 처지는 크게 변합니다.


처음이야 좋았겠지요.


주은래는 영원한 2인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류소기는 국가 주석으로, 팽덕회는 군간부이자 한때 조선의용군 사령관으로 그들의 실력을 뽐냈으니까요.

하지만 다음 주은래는 혁명 지도자에서 황제로 모습을 바꾼 모택동의 제 2인자로서 그나마 여생을 편히(?) 마칠 수 있었지만, 황제 모택동을 비방한 죄를 뒤집어 쓴 팽덕회 그리고 우파의 대장 누명을 쓴 류소기는 문화혁명이라는 광란의 시기를 쉽게 넘기지 못했습니다.

나중 등소평이 정권을 잡고 나서야 복권이 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그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이지요.


아무튼 모택동은 여기에 머물 때까지의 시간이 가장 혁명가다운 모습이었고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쩜 모택동도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나도 모택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홍태양(紅太陽) 황제 모택동의 시기가 아니고 이때까지의 모택동을 좋아 합니다.



모택동 주거 앞에서 그때 당시 홍군 군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아줌마 그리고 홍군 지도부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배나온 아저씨들의 모습을 보니 참 이들이 부럽습디다.


우리나라 북쪽의 거대한 김일성 동상, 남쪽의 거대한 박정희 동상.

한 사람은 항일 지도자이긴 했지만 동족상잔 전쟁의 원흉이면서 세습 왕조를 세워 대대로 충성을 강요한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이야 동상이 서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정말 웃기는 짬뽕이고요.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참 재미가 있었습니다.




지도부 자가용의 역할을 하던 말들을 매 놓던 마구간의 모습과 우물터의 모습도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아마도 제법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한 마을을 통째로 접수해서 홍군 지도부의 거주지로 만든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 그렇게 크진 않아도 제법 공들여 지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조원은 혁명 유적지라기보다는 공원 같은 분위기여서 한참 머물면서 모택동이나 류소기와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지만, 시간은 이미 오후 5시가 다 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갈 연안 혁명 기념관이 문 닫는 시간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서둘러 발길을 돌렸습니

다.


이 조원 혁명 구지는 좋은 사람과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가서, 쉬면서 또 이야기도 나누면 서 이곳저곳 들리면 참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올 때도 버스에 빈자리가 없어서 서서 왔는데, 갈 때도 빈자리가 없어서 서서 갑니다.


이제 무지 피곤한 일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