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섬서 2014 여행

거친 땅, 거친 역사 섬서성을 찾아서 - 연안 延安 140521(상) 봉황산 혁명 구지, 항대(抗大) 기념관

정안군 2014. 6. 16. 15:12

아침은 공짜가 아니랍니다.


정확히 말하면 숙박비에 포함이 안 되었다는군요.

어쩐지 밥표도 안 주더라.

별로 먹잘 것도 없는 것 차려 놓고는 15원이나 받더군요.

하긴 15원이면 우리 돈으로 삼천 원이 안 되는 돈이니 싼 건가요?

그래도 공짜인줄 알고 올라갔는데 아니라고 하니 얼마나 김이 새던지 원.

호텔비도 비싼데다가 밥값도 포함이 안 되어있는 것을 알고 나니 기가 다 빠진 것처럼 처져 있는 몸이고 해서 이곳에서 하루 더 쉬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려, 오전에 서둘러 볼 것 좀 보고 지단(志丹)로 가자고.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

거기 가서 푹 쉬자고.

허나 그게 그렇게 될까나.


그럼 어디를 보면 잘 했다고 소문이 날까요?


바이두 지도에서 검색을 해보니 봉황산 혁명 구지와 항일홍군대학기념관{(抗日紅軍大學紀念館 줄여서 항대 기념관(抗大紀念館)}이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이 두 군데만 더 가보기로 합니다.

우선 봉황산 혁명 구지를 가보기로 하는데, 걷기는 좀 멀고 해서 시내버스로 두 정거장을 가서 내립니다.

그런데 근처에 안내판도 없고 또 공사 중이라서 찾느냐 좀 헤맸습니다.



결국 연안대학 의과대부속병원 앞 봉황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마침 공사 중이라서 제대로 구경은 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튼 둘러보니 여기는 주로 홍군 부속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 중 하나가 홍군 총참모부인가 보지요?




괴수(槐樹)라고 하니 홰나무인가요?

이 나무가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한데 까막눈이라서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일찍부터 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이 혹시 못 들어오게 하면 어쩌나 해서 조심스럽게 다녔는데,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그냥 이곳저곳 다니면서 보긴 했는데, 특별한 인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동굴집 내부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버려진 동굴집들이 몇 개 있어서 그 모습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판 다음 앞에 나무로 문을 만들면 끝...

이런 식 이었더군요.

봉황산 혁명 구지에서 항대 기념관쪽으로 가려고 하면 의대부속병원을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병원 마당에는 서양인의 모습을 한 동상이 서있습니다.

이분이야 보나마다 ‘노먼 베순’이겠지요.

백구은(白求恩)으로 알려진 노먼 베순 캐나다 사람으로 그 당시 홍군이 기초적인 의료 상식도 없어서 병사들이 가벼운 상처만 입어도 악화되어 생명을 잃곤 하던 이 지역에 와서 초보적인 의료 지식과 시술 방법을 위생병들에게 전달 교육을 해서 많은 생명을 살린 의사였지요.

하지만 이 분도 페니실린만 있어도 죽지 않아도 될 패혈증으로 이 땅에 자기 몸을 묻었습니다.

‘중국 인민의 영원한 친구’로 많은 사랑을 받던 분이라서 그 분의 유해는 중국 정권이 수립된 뒤 호북(胡北)성 석가장(石家庄) 혁명열사릉에 묻혔다지요.

아직도 중국 의료계의 상징처럼 되어 있어서 심지어 동티벳 색달(色達)의 인민병원 마당에도 이 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서 자본주의 나라보다도 더 자본주의화 된 이 중국에서 요즘 중국 병원도 환자를 적극적으로 끌어 들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병원 벽에는 이 병원에서 자랑할 만한 의사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붙여 있더군요.

인도적인 생각으로 자기 의료 기술을 전수하던 노먼 베순의 후예들도 이제는 돈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바뀐 모양입니다.


항대 기념관, 그 이름도 찬란한.


항대 기념관은 터만 옛 터이지 옛날 모습은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건물은 엄청나게 크지만 일부만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바로 옆은 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중국 인민 항일 정치군사대학(줄여서 항대)는 말하자면 홍군의 육군사관학교 급입니다.

기념관 안은 항대에 대한 각종 자료를 잘 정리해 놓았는데, 한 중국 청년과 비슷한 리듬으로 구경을 하게 되었어요.





그 가운데 항대 교수진을 소개한 안내판이 있는데, 제일 아래에는 항대에서 포병을 육성했던 무정(武亭)의 이름도 보이더군요.

옆에 있던 중국 청년에게 ‘봐라, 이분은 한국인이란다. 이렇게 한국과 중국은 친구지“

라며 자랑을 하니 이 친구 하는 말, ‘그 사람 조선 사람인데’

윽~~~

이런 때는 뭐라 해야 되지요?

일본 강점기 우리나라는 조선이니까 무정이 그 당시 조선 사람인 것 맞는데, 그 다음이 문제가 되는군요.

해방 뒤 무정은 북조선을 택해서 인민군 장군으로 활약을 했으니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지만 이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하면 안 되나요?

이거 참.

이 친구는 제대로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서 괜히 골치만 아프게 되어버렸습니다.



학교장은 임표였네요.

한 때 중국 정권의 제 2인자로써 신나는 시절도 있었지만, 절대 2인자를 세우지 않는 것이 이 세상 모든 독재자들의 특징이지요.

쿠데타인지 아님 모택동 음모에 걸려들었는지 내몽골 자치주에서 수수께끼의 비행기 사고로 명을 다한 임표.

그 임표도 이 시절이 가장 보람찬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보안(保安) 지금은 지단(志丹) 시절 항대의 모습 그리고 연안 시절의 항대 모습이 전시되어 있고요.



호~~

조선인 정율성(鄭律成)의 모습도 있습니다.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던 분.

그나마 중국에 남는 바람에 요즘 들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해방 후 북을 선택했더라면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았을지도 모를 분입니다.



학생들 가운데에는 이씨 사형제도 있네요.

아, 여자도 있었군요.

사남매가 맞겠습니다.



풍운아 장학량 장군의 동생 장학사(張學思)도 이곳 출신이군요.

이 장씨 동생과 형님은 아마도 살아생전 평생 만나지는 못하고 살았을 것 같습니다.


황극공(黃克功)이란 친구는 뭔가 풍기문란 사건에 말려들어 그 이름을 길이 남겼나 봅니다.




사진을 보면 남자나 여자나 인물은 괜찮아 보입니다.

어쨌든 그림으로 사건을 설명한 것을 보면 이 황극공이가 한 아가씨와 좋아지내다가 이 아가씨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이 아가씨를 살해한 듯합니다.

그리고 발각이 되어 아마도 처벌 받았다는 내용인 듯.

아무튼 어느 동네나 남자 여자관계는 참 별난 일을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지요.













그리고 내용을 잘 알 수 없는 항대 자랑이 이어집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이 대학 출신 장성들.

대장과 상장 그리고 중장 소장들까지 그러니까 장성급들이 나와 있군요.

제법 목에 힘주고 살았던 사람들이지요.

아무튼 장정과 항일 투쟁시기에 살아남은 자들은 정권 수립 후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되긴 하지만 그때부터는 ‘토사구팽’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담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로 바뀌어 있었지요.

이제는 혁명 동지가 아닌 황제로 변한 모택동의 눈 밖에 나면 팽 대상이 되는 세상이었으니.


조선인들의 추억들도 함께 머물고 있는 항대 기념관을 나와 호텔로 돌아옵니다.

이제는 이상은 사라지고 깃발만 나부끼는 혁명의 성도 연안을 떠날 시간입니다.

‘중국의 붉은 별’을 읽으면서 꼭 와보고 싶었던 그 연안.

이제는 다른 여느 중국의 도시처럼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는 그냥 그렇고 그런 도시의 특징만이 진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호텔에서 반복되는 과정.

“퇴방이다”

그러면 무전기로 층 담당 아줌마에게 물건이 다 있는지 확인.

그리고 OK 사인이 나면 남은 돈 돌려받기.

지단가는 버스는 연안 동참(동 터미널)에서 타야 된다고 했는데, 그곳은 내가 머문 호텔에서 시내버스로 두 정거장인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옛 연안 버스 터미널이 동 터미널이 되고, 신 터미널이 남 터미널이 된 모양입니다.





오래되어 낡은 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단가는 버스는 20분에 한 대꼴로 많이 있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버스를 타고 이제 연안을 떠납니다.







이 사진은 항대 기념관에 게시된 연안의 옛 모습입니다.

어떤가요?

좀 정겹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