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연수기

프라하에서

정안군 2006. 7. 27. 08:44

자는 중 마는 둥하다가 새벽 5시 미명에 도둑고양이 같이 탈출을 한다.    인사도 못하고 먼저 나가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인사말을 포스트잇에 써서 문 앞에 붙여 두긴 했지만 마음이 썩 개운하지 못하다.   팀에서 미운 오리새끼 신세만 아니면 돈을 좀 부담하더라도 같이 가서 우리 일행과 프라하 구경을 하면 좋을 텐데.


트람을 타고 나오다가 역 근처를 알려달라고 어렵게 같이 타고 있는 사람에게 의사를 전했더니 어디선가 내리란다.   가르쳐 준 방향으로 종종걸음으로 가니 좀 분위기가 이상하다.  물어보니 이 역이 아니란다.   아니라면 그 다음은.    정말 정신없이 뛰었다. ㅎㅎ


간신히 6시 쯤 역에 도착했는데 기차가 도착을 했는지 또 어디로 사람들이 나오는 줄을 몰라 허둥지둥 헐레벌떡 역 안을 다니는데 나와 같은 모습을 허둥대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고해순 씨?”

“그 바르샤바에서 온 팀?” 


찾았다.


내가 그 팀인 것은 맞지만 나만 떨어져 혼자 이리로 온 것이라고 말하니 기차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본단다.


휴 --- 어쨌든 이제 되었다.


잠시 후 돌아오더니 1시간 정도 연착된다고.   그 시간을 이용해서 차를 다른 곳에 주차해 놓는다고 같이 가자고 한다.   늦게 도착을 해서 할 수 없이 주차 요금이 비싼 역 주차장에다 세워 놓았다고.   차 앞에 동그라미 네 개가 빛나는 아우디이다.   바르샤바를 빼먹은 대신 여러 가지 차를 타본다.   바즐라프 광장에다가 차를 세우면서 돌아오는데 여러 이야기를 해준다.  

 

이곳은 프라하의 봄을 연출했던 광장이며 야경이 멋있다고.

 

어제 도착해서 야경을 보았다고 하니 참 잘했단다.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해주는데 가이드 할 때마다 사람들이 물어보아서 궁금할까봐 미리 이야기를 해준단다.


남편은 LG 상사 주재원으로 프라하에 왔다가 다시 한국에 가게 되었는데 이곳이 너무 좋고 자녀들 교육에도 괜찮아 사표를 내고 무역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기는 체코 말 실력을 살려 가이드로 나섰고.

 

지하철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지하철이 뜸했다.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탔는데 이제는 제대로 늦어 버렸다.

 

그래도 나와 함께 있어서 덜 미안하겠다고 하는 고해순 씨에게 아마도 나하고 같던 죄까지 합쳐져 오늘 꽤 시달릴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역에 가니 성질이 잔뜩 난 단장의 모습이 보인다.   고해순 씨가 미안하다고 해도 뭐라 신경질을 내며.   맞았다.   나 때문에 더 시달리게 생겼다.   *^^*

 

이틀을 밤차에 시달려서 모두 피곤해 보였다.   나는 그래도 반가운데 팀원들이 나를 보아도 본 척을 안 한다.   나를 보면 의식적으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를 본 최 선생이 와서 아는 척을 할 뿐.


아!!! 왕따의 심정을 이해할 만 하겠다.

 

최 선생이 말하길 여기 올 때까지 모두들 내 욕을 엄청나게 해댔단다.   이런 비극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내 특기를 발휘한다.   그러든지 말든지.


어쨌든 프라하 하루 관광의 시작이다.   차에 올라타니 고해순 씨가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다음엔 누군가가 자기소개를 하란다.   음!!! 고해순 씨 말이 틀림이 없군.


체코는 여러 가지로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2차 대전 직전에는 이른바 ‘호랑이와 떡장수 할머니’ 이야기를 히틀러와 직접 시연한 과거도 있고.


“독일계 사람들이 많이 사는 슈테텐 지방을 우리에게 주면 안 잡어 먹지” 이건 히틀러.

주고 나서 다른 나라 반응을 보니 다들 모른 척.   그래서 홀랑 집어 먹었다.

그래도 모른 척 했던 영국과 프랑스.


간덩이가 커진 독일은 결국 폴란드를 집어 먹고 다음은 2차 대전으로 전개된다.   전 후 자기들 문제에서 눈 감고 모른 척 했던 서방 쪽에 체코는 대단한 배신감을 가졌었고 소련에 점령되면서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짧은 프라하의 봄 다음 소련 탱크에게 짓밟히고 벨벳 혁명을 통해 겨우 찾은 민주주의.   경제적 어려움에 아직은 힘들지만 예술의 감각은 정말 뛰어 난 나라.   유명한 작가인 하벨이 민주화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조금씩 조금씩 전반적인 민주화를 위해 그 걸음을 내딛지만 아직도 서부 유럽에 비해서 갈 길이 멀다.


프라하 성안을 방문해서 여기 저기 다니는데 밤에 멀리서 보던 경치에 비해선 그저 그렇다.


만남 장소를 잘못 알려준 것인가 아니면 뭔가 불만이 많이 있는 것인가.   항의성 스트라이크 비슷한 상황이 이어져서 분위기가 갈수록 냉랭해진다.   최 선생에게 들으니 바르샤바의 일정이 엉망이었단다.   거기에다 기계과 단장이 상당히 뻣뻣하게 구는 바람에 계속 분위기가 좋질 않다고.   다들 참 불쌍하기도 하다.   내 돈 내고 여행하면서 싫어도 싫다 소리도 못하고 눈치나 보고 있으니.   도대체 교육부 장학관이 자기들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렇게 꼼짝을 못하는지 모르겠다.


아침 식사는 중국 식당 그리고 점심은 시내 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점심은 서양식이니 그들의 방법대로 스프. 메인 음식, 디저트가 나오는데 배고프다고 한참을 가이드에게 투덜거리던 일행은 디저트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다들 나가 버렸다.


음식은 그 나라 문화가 잘 나타나는 것이라서 음식도 여행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매너 없음은 황당 그 자체.   앞으로 해외 여행객들은 자격시험을 보고 내 보내야 망신을 안 당할까?


크리스털 제품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게에 들어가 보니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   기념품으로 유리 종 하나는 샀는데 잔 세트를 사서 자형 부부 선물하려고 해도 돈이 모자라다.  

이런... 

 

그럭저럭 일정은 끝나고 다시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우리 일행들은 아침에 도착해서 그 날 저녁에 돌아가는 것.   정말 프라하 야경은 백만 불짜리인데 그것도 못 보고 가는 우리 일행이 안타깝기만 하다.   여행은 기분 좋으라고 하는 것인데 다들 피곤에 절어서 신경질적이고.


그 동안 통 모른척했던 단장이 나를 자기 자리 앞으로 부른다.   뭐라 하나 했더니 역시 일방적인 훈계이다.

 

나는 흥분을 누르고 분명하게 말을 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리고 그나마 그것이 미안해서 프라하로 오지 않았는가?   우리 일행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당신은 모른다.

 

그랬더니 왜 아침에 가이드를 데리고 다른 곳에 갔다가 늦게 왔냐고 한다.

 

정말 황당해서 말이 안나왔다.

그것이 못 마땅했으면 그 때 바로 이야기하지 왜 이제 이야기하느냐.   그리고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

 

해도 결론은 자기는 이제까지 나를 잘 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나?

 

나도 결론을 내린다.


나도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 본다.   아파서 못 가겠다는 사람에게 욕을 하며 또 그것에 대한 물음은 하나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누구든 수긍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데 옆에 있던 동료 두 사람은 자는 척하며 눈을 감고는 아무 반응도 없다.

오늘 좋은 것을 배운다.

 

일방적인 훈계는 통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반감만 준다는 평범한 진리.

 

그리고 우리나라의 패거리 문화, 강자에게 비굴할 정도의 자기 낮춤.


베를린 숙소에 돌아와서 뒤풀이를 한다.   또 마지막 자유 여행으로 지정된 주말에 단체 여행을 추진한다나?     엿이나 먹어라.   나는 죽어도 그 짓은 못한다.


자정 가까이 된 시간 TV는 그 때까지 혼자 떠들었는데 끄려고 하니 거의 포르노 수준의 프로가 나온다.


아이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서 심야에는 포르노 방송을 한 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인가 보다.

 

뱀 뒷다리) 프라하를 제대로 구경하기 위한 추천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photo/128099

 

<대통령궁이라고 했던가?>

 

<카를 다리>

 

 

 

<프라하 성 여기저기에서>

 

<후스 동상>

 

후스 [Huss, Johannes, 1369 ?~1415.7.6]

 

보헤미아 남부 후시네츠 출생.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프라하대학교 교수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1401년 철학부장, 1402∼1403년 학장, 1409년 총장직 등을 지냈다. 한편, 1400년 가톨릭 사제가 되었는데, 프라하대학장 시절 그곳의 베들레헴 성당 주임신부를 겸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좋은 강연을 많이 하였다.

 

종교개혁자로서는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인 J.위클리프의 설을 받아들여, 친구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예정구령설()을 강조하며,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이른바 성직매매() 등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하였고, 프라하 대주교 즈비녜크의 후원을 얻어 프라하대학교 내에서의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1406년 체코어의 정자법()을 확립(1406), 성서와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로마 교회는 분열의 혼란 중에 있어서 한동안 후스의 움직임을 묵인하고 있었으나, 1410년 피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후스에게 그 동안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고, 후임 교황인 요하네스 23세도 1411년에 후스를 파문()하였다. 후스는 여전히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로마교회는 이것을 철저히 단속할 필요를 느끼고 1414년에 콘스탄츠공의회에 후스를 소환, 그의 저서에 있는 이단사상으로 지목되는 부분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기 때문에, 지기스문트 황제의 안전통행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415년 콘스탄츠 교외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처사는 커다란 의분을 불러일으켜 1419∼1434년의 후스전쟁을 유발시켰다.

 

기독교란 종교는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나도 기독교인지만 이런 것을 보면 참 부끄럽기도 하다.

 

로마 탑압기 때 순교했던 사람들 숫자보다 중세 때 같은 기독교인들의 손에 의해 마녀라든지 이단이라든지 하는 죄명으로 죽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훨씬 많다고 하니 이런 참.

 

지금도 레바논 폭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그 뒤에는 기독교 국가라하는 미국이 있으니 아이러니인지 원래 기독교 속성이 그런 것인지.

 

 

 

또 뱀뒷다리 하나 더

 

체코 프라하는 1976년 개봉된 새벽의 7인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이다.

 

나치 점령하의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대로 이곳으로 기차를 타고 오는 나치 총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려고 영국의 체코 망명정부가 보낸 특수 암살 요원들과 동료의 배신으로 나치들의 추적으로 비극적 종말을 맞기까지를 그린 명작 전쟁 드라마.

 

앨란 버제스가 실화를  '새벽의 7인(Seven Men At Daybreak)'이란 제목으로 쓴 소설이 원작이다.

하이드리히 암살 계획의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드디어 이들은 하이드리히를 저격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동료의 밀고로 나치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되고 마지막 7명은 성당에서 끝까지 저항하며 대항한다.

 

결국 모두 쓰러지고 마지막 성당 지하실에 두 사람이 남았을 때 나치는 호수를 들이대고 물을 채우기 시작한다.

 

점차 차오르는 물, 이제 어쩔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서로 포옹하고 상대방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총소리와 함께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다.

 

 

 

배신한 동료는 살아서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마치 청와대 사건 뒤 살아남은 김신조씨처럼 이름을 확인하고 나치의 보복은 혹독했다.

 

그들의 출신지 '리디체'와 '데자키'에 살던 남녀노소를 망론하고 성인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어린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지도상에서 조차 제거해 버리는데.

 

 

영화가 끝나면서 자막으로 요원들을 밀고한 자는 결국 전쟁 후 처형되고 두 도시는 다시 재건된단다.

 

처절했던 약소국 백성들과 그들의 저항이 우리 정서와 잘 어울리면서 많은 감동을 주었던 영화의 배경이 된 그 곳.

 

바로 프라하다.

 

 

암살 요원들이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성 키릴과 메서디우스 정교회(Orthodox Church of Saints Cyril and Method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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