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성을 가다

1. 야마구치 하기(萩)성

정안군 2012. 7. 25. 11:12


시모노세키에서 하기까지


하기시 지도


1998년 8월 21일부터 8월 26일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처음 일본 땅을 밟고 돌아왔다. 일본이라고 해봐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인 변두리 야마구치현의 하기(萩)시와 후쿠오카(福岡)인데, 사실 제법 큰 도회지 후쿠오카보다는 촌 동네 하기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하기는 나를 위해, 후쿠오카는 시골이 지겨울 두 아들을 위해 선택된 곳이었다.


왜 하기같은 시골 마을에 관심이 갔냐고?


처음에는 일본의 성에 관심이 있었다. 아, 여기서 성은 성(性) 생활할 때의 성이 아니고, 남한산성할 때의 성(城)이다. 오해하시마시라. 왜 성에 관심이 갔나하면 처음에는 우리나라 산성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우리나라 산성은 자료가 부족해서 제대로 알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우연히 인터넷에서 접한 일본 성에 대한 많은 정보나 체계화된 용어를 보고 조금씩 지식의 폭을 넓혀 갔는데, 그러다 보니 일본어를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어를 공부하기에 이른다. 일본어를 알게 되니 더 공부하고 싶어져서 일본어 책을 고르게 되는데 마침 서울 교보문고에서 일본 전국시대에 대한 책을 몇 권 구입해서 읽으니 그야말로 흥미가 진진했다. 그 가운데 일본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소위 메이지유신 무렵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육군을 주무르던 인물들과 그 뒤 아베 수상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일본 정계와 군계를 주름잡던 일본판 TK인 하기의 현 모습은 과연 어떤지 많이 궁금했다.


아직도 일본 강점기 시대는 우리나라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는(?) 인간들과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 선열들이 타국에서 힘든 나날을 이어갈 때 일신의 영예를 위해 일본 육사를 선택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 육군 중위 출신이 해방된 조국의 군인이 되어 민주 정부를 뒤집어엎고 정권을 탈취해 대통령이 된 나라, 그리고 더럽게 살다가 더럽게 죽었지만 그래도 영웅 대접을 받는 나라, 또 그 딸이 그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서 많은 지지를 받는 이상한 나라인 내 조국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기까지 하기 출신들이 저지른 일이 이토록 직간접적으로 아직도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오호통재라, 오호애재라.


그들이 누구냐 하면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普作)와 소위 메이지유신 뒤에 일본 정부의 요인이 되지만 우리나라 민중에게는 원수가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그리고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런 인간들의 고향이 바로 이 동네이다.


또 이 동네 옛 이름인 죠슈(長州의) 다이묘(大名) 모리(毛利) 집안은 요즘 뉴 라이트인지 뉴 또라인지 아무튼 그들 이론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우리 조선에 건너와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간 인간이기도 하고.


어쨌든 하기는 근대와 현대에서 우리나라와 많은 관계를 맺은 인간들이 기저귀를 차고 놀던 동네라는 것이다.


일본과는 아무래도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이 이런 인간들은 일본에서는 영웅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보면 날강도 내지는 나쁜 놈, 명백이 같은 놈들이 되는 것이니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하긴 요즘 신종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키우는 세상이니, 해방되고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한 우리의 비극일 수도 있겠다.


그런 그렇고, 97년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이전과 이후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충격을 준 IMF가 시행된 해였다.

우리나라 돈의 가치는 추락하고 외환의 가치는 엄청나게 올랐는데, 사실 우리나라에 사는 보통 사람들은 그 당시 이게 뭔가 했다.

외국에 나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입물건은 비싸면 안 쓰면 되었으니.

뭔지는 모르지만 그냥 큰 일이 일어난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것이 사회 구조와 머리 구조를 바꾸는 충격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는 거.


아무튼 96년에 독일 연수를 다녀오면서 쓰다 남은 독일 돈 마르크를 가지고 왔었는데, 이 마르크가 독일 가기 전에 바꿀 때는 일 마르크에 500원 정도였는데, IMF 이후에는 1,500원 정도였다.


가지고 있던 이 돈을 바꾸니 간단하게 일본 여행 경비가 나와서 큰 부담도 없었다.

IMF의 덕을 보았다고 해야 되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이렇게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그늘이 있으면 빛도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세삼 깨닫는다.


충주에서 대전까지는 무궁화호, 그리고 대전에서는 공통승차권에 포함된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 때는 KTX가 없을 때라서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것이 새마을호였는데 차보니 몸과 마음이 함께 신이 났던 것이다. 뭔가 최고 인간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역시 돈은 좋은 것이여 하고 말이다.


이 때 이용한 공통승차권이라는 것은 서울이나 대전, 대구 그리고 부산에서 일본 목적지까지 기차와 중간에 배를 묶어 철도청에서 파는 것이었는데 상당히 저렴했다. 지금도 판매 중인 것으로 안다.


대전에서 기차에 오르니 앞자리에 앉아계신 신사 한 분을 만나게 되는데, 그 분에게 우리가 하기에 간다고 하니 처음에는 어디인가 하다가 이토 히로부미의 고향이라고 하니,


“아, 항이”


일본어 하기의 정확한 발음은 하기보다는 항이에 더 가깝다는 것을 그 분을 통해 아는 순간이었다.


이분은 참 지식이 많으신 분이었다.


작시라는 일본어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에는 수저를 쓰지 않으니 단어도 거의 사용되지 않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수저 없이 밥 먹지 말고 스푼을 달라고 해서 같이 써라. 일본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일본과 우리의 차이니 그냥 무시하면 된다는 말씀, 그리고 고오리, 도오게라는 말은 우리나라 고을, 고개에서 나온 것으로 잘 찾아보면 일본어 용어에는 우리말이 참 많다는 것 등,


거기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고 많이 배우면 좋을 것이라면서 좋은 여행이 되길 빈다는 좋은 말씀도 해주셔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부산에 도착하여 슬슬 걸어서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로 이동하여 잠시 기다리다가 출국 수속을 받고 배에 오른다.

페리 시설은 훌륭했다.


작년 독일 마르크를 가지고 있는 탓에 겁도 없이 일본 여행을 하겠다고 여기까지 왔었는데 강풍으로 취소되어 그냥 돌아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강풍은 둘째 영향이고, 첫째 영향은 엄청나게 오늘 일본 돈의 영향으로 일본에 가는 사람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람이 조금 세게 부니 그냥 취소하고 만 것이라는 증거 없는 의심이 들었었다.


다시 일년 뒤, 나와 아들 두 명은 부산에서 막 선보인 부관페리 ‘하마유’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하마유는 시모노세키의 시화로 문주란을 일본어로 하마유라고 한단다.

안에는 목욕탕도 있고 시설도 너무 깨끗했는데, 역시 일본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게 해줬다.


저녁에 출항을 하여 새벽녘에는 이미 시모노세키에 도착을 하지만, 출입국 관리들의 사정으로 7시가 넘어 내리기 시작한다.

보따리 상인들이 많았지만 관광을 위해 입국하는 사람들이 먼저 내릴 수 있어서 간단한 심사를 마치고 일본 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페리 승무원들은 입국 심사장에 서 있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잘 하지도 못하는 한국말로 이것저것 도와주었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고마웠다.


이 노선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많은 사연이 있는 관부연락선 혹은 부관연락선이 다니던 곳이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일본의 관문인 이곳 시모노세키에 도착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 대부분은 북해도로 또는 규슈 탄광으로 계속해서 이동을 했겠지.


그 중에는 우리 장인어른도 동네 사람들과 섞여 이곳에 내렸을 테고, 여기서 기차를 타고 멀리 가와사키까지 갔던 것이고.

이때 받은 충격이 뒷날의 장인어른의 인생 여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니, 이 항구는 내 인생과도 3 % 정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입국심사를 하는데, 입국심사관이 일본어로 몇 마디 묻기에 영어로 답하니 일본어를 모르냐고.

해서 일본어를 잘 모른다고 하니 왜 일본어를 모르냐고?

웃기는 놈이었는데, 그래도 잘못 보이면 집에 돌아가라고 할까봐 그냥 웃고 말았다.


사실 그때는 일본어 실력이 막강할 때이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영어로 말했던 것인데 이 친구가 이상하게 반응을 했던 것이다.

여객 터미널에서 나오니 처음 접하는 일본의 모습이 새롭다.

시모노세키 기차역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청년에게 길을 물었다.

“이마, 에키에 이쿠토고로데스카(지금, 역으로 가는 중입니까)?”

“나니(왜)?”

기분 나쁜 듯 이상하게 반응을 한다.

“와다시와 칸코쿠진데스(나는 한국인입니다)”

대번 표정이 바뀌면서 급 친절모드.

자기도 가는 중이니 따라 오란다.

거리도 멀지않고 택시는 무지 비싸다고.


역 건물은 크지 않고 아담했다.

여기에서 그 총각에게 하기 유스호스텔이 가장 가까운 역 다마에(玉江)까지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 부탁을 받은 총각은 역원에게 물어보니 엄청난 두께의 책을 꺼내더니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시간을 알려주는데 바로 기차가 있단다.

중간에 두 번을 갈아타야 된다고.

임무를 마친 총각은 안녕을 고하고 자기 길을 가는데, 나는 그 때 뭔가에 정신을 팔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그를 보냈다.


왜 그랬을까?


시모노세키역으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던 기차에 오른다.

세 칸짜리 아담한 기차였다.

탄 사람들은 별로 없어 시골 마을로 향하는 기차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니 옆으로 바다가 보인다.

우리나라 동해이다.

고구시(小串)라는 동네에 이른다.

小串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된다고 해서 이 小串를 어떻게 읽는지 옆자리에 있던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웃으면서 모르겠단다.

이것이 일본어의 실정이다.

한참을 이것저것 뒤적거리던 아가씨는 마침 지나가던 차장에게 물어보니 고구시라고.

꼬치를 나타내는 관(串)자가 구시라고 하니 우리말과 뭔가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우리가 내린 바로 옆에는 달랑 한 량짜리 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미니 기차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퍽 당황스럽다.

이 달랑 한량짜리 기차는 고구시에서 나가토까지 가는 기차인데, 기차가 작은 것처럼 당연히 사람도 없다.

그래도 다행히 여기부터는 경치가 더 좋아진다.

바다가 있는 풍경이 이어지는데, 우리 아이들은 피곤한지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러다가 나가토(長門)에서 두량짜리 기차로 다시 바꿔 타고 한참을 달려 목적지 다마에까지 이른다.


여기서 조금 걸으면 하기 성터가 보이고 그 앞에 있는 유스호스텔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날이 무척이나 더웠지만, 호스텔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여기저기 다니기 시작하는데,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날은 더운데 지 애비를 따라 다녀야만 하는 두 아들은 입이 한참 나와 있었다.

자전거를 내줄 때 호스텔 주인장은 마프가 필요하냐고 묻던데, 도대체 마프가 뭘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으니 가져다주는데 맵(Map)그러니까 시내 지도였다.

마프라, 영어 발음이 엉성하기로 유명한 일본답다.


우선은 쇼인(松陰)신사에 가서 우리나라를 집어먹을 때 많은 역할들을 한 인간들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새끼, 이등 박문, 이토 히로부미라는 놈도 당연히 있었다..

그리고는 그곳을 나와 시내에서 도시락을 산 다음 해변으로 내달려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은 기쿠가하마 해변은 참 조용하고 시원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비해 사면이 바다인 일본은 여기저기 해변이 있어서일까 한참 시즌일 듯한 시기인데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 앉아서 있다보니 시내 구경보다 그냥 여기서 노는 것이 아이들 정신 건강에도 좋을 듯싶었다.

날이 너무 더워 여기 저기 다닌다는 것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해변에서 놀다가 유스호스텔에 돌아와서 그 안에 있는 목욕탕에 가니 웬 외국인이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물어보니 독일산이란다.


일본어를 하고 다니느냐고 머리가 그쪽에 핀트가 맞추어져 있어서 그런지 영어가 통 생각나질 않았다.

이런 일이 있다니.


한 여름 삼복더위에 이렇게 엄청나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목욕을 하고나니 몸이 시원해졌다.


확실한 이열치열 효과였다.

하지만 우리 애들은 절대 “NO"란다.


화장실과 목욕탕은 완전 퍼펙트 깨끗하였는데, 화장실 소변기는 물기하나 없는 완벽함이 있을 정도.


어쨌든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에어컨은 새벽에 작동이 안 되었는데 엄청난 더위를 느낄 정도였으니 아마도 열대야가 있지 않았나 싶었다.


저녁에만 간신히 돌아간 그 야박한 에어컨 인심을 확인한다.


아침 식사는 유스 호스텔에서 먹었는데, 아주 간단한 음식이었다.


아주 작은 김 몇 장과 반찬 아주 조금, 날달걀이 하나 그리고 국.


일본 사람들들 이거 먹고 어떻게 사나 싶었다.


그리고 머지않은 곳에 크리스천 순교지가 있어서 가보았다.


어디선가 먼 지역에 살던 크리스천이 자기 고향을 떠나 이곳까지 끌려와서는 순교한 터인데 같은 인간으로써 마음이 짠해왔다.


나는 마음이 짠한데 이 동네 모기들은 새로운 맛을 보게 되었다고 달려들어 이들에게 피를 선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는 믿음을 위해 자기 피를, 어떤 이는 모기를 위해 자기 피를.


유스호스텔 앞은 하기성터가 있었는데, 별 지식도 없고 관심도 없어서 가보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 하기성과 하기에 대한 소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하기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하기(萩)성


하기로 밀려난 모리(毛利)의 무념을 견고함으로 봉합한 성


세키가하라의 전투 뒤, 쥬고쿠(中國) 8개국 120만석이라는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스오[(周防 ; 일본의 옛 지명. 현재의 야마구치(山口)현 동부], 나가토[(長門 ; 일본의 옛 지명, 현재의 야마구치(山口)현의 서북부)]를 제외한 6개국을 몰수당했다. 일족인 깃카와(吉川)씨가 이에야스와 [모리가 결전에 참가하지 않으면 영토는 그대로]라는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방관 자세 작전을 취했던 데루모토에게는 속았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한 데루모토에게 축성이 허락된 것이 영토에서 변방이었던 하기. 축성이 예정된 아부가와(阿武川) 하구 델타 지대는 미개발지였지만, 만조 때에는 바다에 덥혀버리는 토지를 매립하여 시즈키야마(指月山)를 성의 영역으로 집어넣었다. 성곽은 전국 건축 기술을 구사하여 전투에 대비한 배치가 이루어졌고, 산 아래에서 조금 떨어진 지천과 산이 절벽을 이룬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요새가 되었다.


에도 막부 마지막 언저리에서 무대 밖으로 등장한 모리 씨와 하기성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하기성이 역사의 무대 밖으로 등장한다. 즉 모리 씨가 햇빛을 보기까지는 막부 말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막부 말이 되면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이 머리를 내밀어 타도 막부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되었다. 특히 죠슈(長州)라는 통칭 이름으로 알려진 하기는 막부 말 정국을 좌우하는 중요한 번이 된다.

모리 집안 13대가 되는 번주 다카치카(敬親)는 기운 번 재정을 바로잡기 위해 개혁을 실시한다. 이를 기화로 개혁파와 반대파의 번내 항쟁으로 발전해 간다. 개혁파의 흐름을 함께 한 급진파는 양이를 목표로 하지만, 곧 반대파와 흐름을 함께 한 보수파에게 번정을 내어주게 된다. 보수파에게 둘러싸인 하기에서는 양이를 실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다카치카는 1863년 4월 본거지를 야마구치(山口)로 옮기며 성을 쌓아, 하기성은 사실상 그 역사의 막을 내린다.

1861년 11월, 막부에서 정벌령이 내려지고 다카치카는 하기로 돌아와 사원에서 근신의 몸으로 지내게 된다. 이 때 보수파는 하기성을 본거지로 저급한 정부를 옹립하지만, 머지않아 무너져 하기성은 완전히 폐성이 된다. 다카치카는 다시 야마구치로 돌아와 막부 타도의 정책을 밀어 메이지 유신을 맞게 된다. 1873년 메이지 정부가 [성곽 파각령(城郭 破却令)]을 내리자 무장 해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한발 빠르게 하기성을 경매에 내놓아 다음 해에는 하기성에 있던 건물 모두가 철거된다.

현재 하기성에는 석축만 남았을 뿐 그곳에 담겨졌던 모리의 생각이 성취되었던 것처럼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해자 넘어 열린 여름 귤


단색 톤의 거리를 수놓는 죠카마치(성 아래 마을) 하기의 초여름 풍물시


하기 거리 가운데를 산책하면 역사의 깊이가 새겨진 해자로부터 얼굴을 내미는 화려한 여름 귤이 눈을 끈다. 이것은 메이지가 되어 직업을 잃은 토족을 위해서 구번 사무라이 오바타 다카마사(小幡高政)가 신사업으로 장려하여 여름 귤의 재배가 성해진 것의 자취이다. 소와 30년대 경까지는 이 지방의 주요 산물이 되었지만, 지금은 민가 정원에 남겨진 정도이다.

장소에 따라서는 모리 번 중신들의 저택들이 이어진 호리우치(堀內) 경계 모퉁이에서도 볼 수가 있다. 이 여름 귤, 황금색의 열매가 얼굴을 내미는 것은 12월에서 8월에 걸쳐서인데, 5월 중순에서 6월 상순에는 희고 작은 꽃이 피어 새콤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떠돈다. 성 아래 마을을 걷기에는 최고의 계절이다.


마쓰시타(松下) 촌숙(村塾)


막부 말의 동지로서 함께 배워 일본을 움직인 남자들


모리 씨가 대대 치세를 행하여 온 하기 성 아래는 메이지 유신 발상의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이다. 근대국가 일본을 탄생시키기 위한 격동의 시대 막부 말에 하기번은 그 중심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해낸다.

막부 말 각 번의 번론은 구수파와 급진파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하기 번에는 조정을 중하게 여기는 타도 막부 쪽으로 의견이 강해진다. 이 번론을 결정한 급진파의 번 사무라이들에게 강한 영향을 준 것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었다.

쇼인은 하기 번 사무라이 우에스기(士杉) 집안에서 태어나, 야마가류(山鹿流)의 병학사범인 숙부(아버지의 남동생) 요시다 다이스케(吉田大助)의 뒤를 잇는다. 항상 해외에 눈을 돌리고 있던 쇼인은 본가에 마츠시타 촌숙을 열어 시대에 관한 독자의 사상을 설파했다.

쇼인이 마쓰시다 촌숙에서 활동한 것은 불과 3년 못미처였지만,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普作) 등 4명의 마쓰시다 문하생 사천왕을 시작으로 유신 뒤에 메이지 정부의 요인이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도 촌숙의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하기 성 아래 마을에는 지금도 마쓰시다 촌숙을 비롯해 당시 촌숙 학생들이었던 구택이 남아있다.


성 아래 마을의 요코초(橫丁)


하기 성 역사를 말하는 사적이 그대로 보존된 길거리


산인(山陰)지방의 소도시인 하기시. 약 250년의 역사를 새긴 하기성이 폐성이 되고 야마구치시가 현청 소재지가 되고부터는 교통이 불편하여 도시화가 늦어졌다. 이 때문에 죠카마치의 모습이 보존되어 시가지 전체가 사적처럼 되어 있다.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성곽 모두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히기성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융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길거리 풍경이다.

특히 에도야요코쵸(江戶屋橫丁)와 기쿠야요코초(菊屋橫丁) 등에는 중급 무사의 저택 터와 호상(豪商)들의 집과 창고들이 남아 있고, 흰 벽과 검은 나무 벽(黑板塀), 흙벽이 이어져 당시 풍정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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