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성을 가다

4. 효고현 히메지성

정안군 2012. 7. 30. 14:24



오사카성에서 나온 나와 아들은 공원앞(公園前)역에서 순환선을 타고 신오사카역으로 갔다. 여기서 신간센을 타고 히메지(姬路)로 향했는데, 지정석을 잡지 않아 일반석에 탔더니 하필 흡연실이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몰라도 그 때 일본 신간센에는 흡연석이 있었고, 그 이름대로 연기가 자욱한 차내 환경이 흡연자에게는 천국으로 보였는지는 몰라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에게는 조금 힘든 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이니 그냥 견딘다.


히메지역에 도착하여 역을 나서고 직선 길을 따라 오르면, 일본에서 명성(名城)으로 명성(名聲)이 높은 히메지 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서 입장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가보니 걱정이 현실이 되어 입장할 수가 없었다.


문 앞에서 보는 히메지성은 참 대단했다.


그러나 입장 시간이 늦었다고 하니 어쩌랴.


다시 오사카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아카시(明石)대교의 모습을 스치는 정도라도 보고 싶어 쾌속을 선택했다.

원하는 대로 어둠이 짙어진 가운데 거대한 스팬을 자랑하는 현수교 아카시 대교를 기차 안에서 보기는 했지만, 오사카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희메지(姬路)성

시대의 고비에 세워진 명성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토대로 했다.


[일본 제일의 명성(名城)]이라는 칭송이 높은 희메지성. 현재 그 모습을 남기고 있는 성곽은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에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가 축성한 것이다. 혼란이 계속되던 전국 시대가 끝이 나고, 태평 세상을 맞게 되는 시기이었지만, 도쿠가와와 도요토미의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이봉된 성주들은 성을 단속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히메지성의 경우는 도쿠가와 막부의 중심이 되는 성(本城)의 전위라는 역할이 주어졌고, 게다가 에도성 축성을 향해 [천하공사(天下普請)] 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시행이라는 성격도 컸다. 이 때문에 데루마사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중책이 맡겨진 것이 되었다.

이런 정도까지 역사적인 사명이 담긴 축성 공사를 단지 이케다 한 번(藩)만으로 행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도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데루마사는 축성에 앞서 겐치(檢地 ; 논밭의 면적·경계·수확고 등을 검사함)를 행하여 다이코겐치(太合檢地 ; 토요토미가 농민의 지배를 한층 강화하면서 조세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실시한 토지 조사)보다도 먼저 조세 수입의 증가를 꾀했다. 이후, 백성들의 부담이 늘은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히데요시의 축성부터 30여년, 거의 계속된 부역이 행하여져 백성들의 가혹한 생활은 성이 완성하는 9년 뒤까지 계속되는 결과를 나았다


백로가 날개를 활짝 편 모습에 비교되는 넉넉한 아름다움이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그렇게 해서 완성시킨 성은 최고조에 달했다고 할 수 있는 일본 독자의 성곽 건축 기술을 구사한 것이 되었다. 그 오묘한 성계는 가장 잘 표현되고 있는 것은 성역 전체가 하나의 큰 요새를 형성하고 있는 건축물의 배치이다. 나선형 영역 배치라고 불리는 그것은 천수각이 있는 혼마루를 중심으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니시(西)노마루, 이것에 더해 삼중의 해자가 나선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복잡한 한편 오묘한 구성은 좀처럼 천수각에 도달할 수 없는 마치 미로였다.

그리고 천수각을 시작하여 모든 건조물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벽은 물론 처마 안까지 순백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중에 지붕 기와의 이음매에도 흰 아연을 올린 것처럼 세공을 하여, 다른 성에 흔히 있는 위압감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여성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그 모습은 건조물의 배치와 서로 어울려서 요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또, 이 성은 긴 역사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나 화재에 휘말린 적도 없었다. 이러한 역사의 무게가 백로의 모습을 닮았다는 성곽의 경관에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


시대의 총아도 성주에


마음 따뜻한 일화가 남은 성이 히데요시 출세의 발판이 되었다.


여러 성주의 손에 의해 지켜진 희메지성이지만, 그 중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당시 노부나가에 의해 쥬고쿠(中國) 정벌의 임무를 맡은 히데요시는 구로다 죠스이(黑田如水)로부터 희메지성을 양도 받아 쥬고쿠 공략의 본거지로써 혼마루에 처음으로 삼층 천수를 짓는다.

이 때 에피소드를 전하는 것이 건소천수(乾小天守) 석축에 있는 우바가이시(姥が石 ; 노파의 돌)이다. 성에서 돌 수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들은 노파는 장사 도구였던 맷돌을 내왔다. 그 뜻을 어여삐 여겨 히데요시가 석축에 맞춰 집어넣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성 아래에서도 평판을 얻어, 사람들이 다투어 돌을 내었기 때문에 공사가 예정보다 빨리 완료되었다고 한다.


센희메(千姬)와 히메지성


성의 모양을 완성시킨 혼다(本多)씨와 박복했던 공주가 준 영향력


희메지성에는 무슨 일인지 여성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도 특히 인상 깊은 것이 센희메일 것이다.

히메는 불과 7세에 정략결혼으로 시작하여 그 뒤, 재혼으로 벌어진 행복한 날들도 한 순간, 젊어서 맏아들과 남편을 잃어버리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 센희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로, 재혼 상대인 혼다 다다토키(本田忠刻)는 이케다씨 뒤를 이어 히메지 성주가 된 혼다 다다마사(本田忠政)의 적남(嫡男)이었다. 센희메에게는 십만 석의 화장품 값이 주어졌는데, 혼다씨가 벌린 니시노마루, 산노마루와 같은 새로운 조영(造營)에는 희메의 화장품 값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전설의 탈출구


이케다 데루마사가 준비한 탈출 경로


우물에서 해자로 통하는 지하도가 있는가


성에는 적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장치나 계략을 해 놓았지만, 희메지성에도 이케다 데루마사가 만들었다고 하는 탈출구의 전설이 있다. 대천수 아래 성곽의 우물에서 희제문(喜濟門) 근처 토루 또는 기쿠 우물부터 띠 성곽 아래의 해자로 통한 것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들 성 안의 우물에서 해자 끝으로 통했다는 탈출 경로는 실증할 수는 없겠지만, 비상시에 사용할 간도(間道)는 지금도 그 형상을 확인할 수가 있다. 간도라고 하는 것은 길의 존재를 알 수 없게끔 초목으로 덮어 숨기는 것으로, 니시노마루 서부의 원시림 근처에 몇 개의 통로가 있다고 한다.


기운 천수(天守)


일생의 대작이 조금씩 기울어 몸을 던진 동량(棟梁)


이케다 데루마사의 희메지성이 쌓여진 뒤, 한 남자가 천수에서 몸을 던졌다.

성의 공사에 참여했던 대목(大木)의 중심인물, 사쿠라이 겐베(櫻井源兵衛)였다. [정성들여 만든 천수인데, 동남쪽으로 기울은 것은]라고 생각한 겐베는 천수에 올라가, 동반한 처에게 물었다. 그래서 [성은 훌륭한데 애석하게도 조금 기울어져 있네요]라는 답에 돌연히 애용하던 끌을 입에 물고는 뛰어 내렸다고 한다.

소와 15년과 17년 두 번에 걸친 조사에 의해, 동남쪽으로 42.42 cm가 기울어진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축성 때 천수대의 넓이가 작아 산마루를 깎아서 동남쪽을 매립할 때 충분히 다지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다. 그 후 개축공사에서 토대를 고정하여 지금은 기울어지고 있지 않다.


모자이크 성


개축이 반복된 성 역사를 다양한 성주의 기와 무늬가 말한다,


희메지성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어느 시대에도 정국의 주축으로써 주목받았기 때문에 성주가 바뀌어 왔다.

성주가 바뀌면서 앞의 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그 폐자재는 새로운 성을 만들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축성이나 개축을 할 때 성주는 확실히 자신의 행적을 성에 새겨 넣고 싶었을 것이다. 지붕의 귀면와(鬼瓦)와 와당(軒丸瓦)은 자기 집안 문양 넣은 것을 사용했기 때문에, 하시바씨의 오동나무(桐)와 사카이(酒井)씨의 겐카타바미(剣酢漿草 ; 괭이밥에 칼을 붙인 것)등 다양한 집안 문양을 볼 수 있다. 또 석등, 오륜탑, 석관까지도 석축 쌓는데 사용된 것도 흥미가 있어 마치 모자이크 같다고나 할까.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의 요괴 퇴치


축성 때 고통 받은 성민, 그 원한으로부터 생겨난 요괴 전설


기노시타 이에마사(木下家正)가 성주일 때,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름을 감추고 병졸로 있었다. 천수에 밤만 되면 요괴가 나온다는 고문으로 누구도 숙직을 하려고 하지 않을 때, 무사시 만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근무를 하였기 때문에, 유명한 무예자라는 것이 알려져 요괴 퇴치를 명받아 이를 멋있게 해결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이야기는 시대 고증을 하면, 아귀가 맞지 않는 점이 많다. 물론 사실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사회적 배경을 말하는 것으로 히데요시의 축성에 의해 가혹할 정도로 몰렸던 성민들의 원한의 소리가 요괴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괴담화의 원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명을 어긴 여성의 슬픈 이야기


희메지성에는 반슈 사라야시키(播州皿屋敷)로 알려진 전설이 있어, 에도 시대의 괴담(怪談) 반쵸야시키(播町皿屋敷)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때, 싯켄(執權)의 납치 시도를 알아차린 가신은 첩 기쿠(菊)를 하녀로 잠입시켜 낌새를 살피게 했다. 이로 인해 성주 암살은 실패하고 기쿠의 역할을 안 싯켄은 가보인 접시 하나를 숨기고서는 기쿠에게 힐책과 체벌을 반복했다.

거듭 자신에게 복종하게끔 하였지만, 기쿠가 거부했기 때문에 죽여서 우물에 내던져 버렸다. 이후 밤만 되면 우물의 속에서 접시를 세는 소리가 들려오게 되었다.

이 우물이 천수각 아래에 있는 오기쿠우물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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