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성을 가다

3. 오사카성

정안군 2012. 7. 29. 18:23



1999년 1월 16일부터 1월 20일까지 일본을 다시 다녀왔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부관페리로 간 다음, 일단 후쿠오카로 이동하여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새벽 간사이(關西) 레일패스를 이용하여 신간센(新幹線)으로 오사카까지 갔다.


신간센은 역시 빠르기는 했지만, 독일 ICE보다는 좀 떨어졌고 프랑스 TGV와 비슷한 좌석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일본이라는 나라 특성 상 터널이 너무 많아 여행의 재미를 느끼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수단이었다는 거.


일단 신오사카(新大板)에서 내려, 하루카(はるか)로 갈아타고는 덴노지로, 다시 덴노지에서 순환열차로 신이마미야역(新今宮)으로 이동을 해서 역 바로 옆에 있는 선 플라자 호텔로 이동했는데,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너무 안내판이 친절하니까.


이렇게 오사카 신이마미야역 근처에 있는 선 플라자 호텔을 거점으로 해서 다음 날은 교토를 다녀오고, 나라와 오사카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하였다. 막강한 간사이 패스여...


신이마미야는 오사카 순환선이 다니는 역이라서 여기저기 다니기에는 편하고, 선 프라자 호텔은 허름하기는 하지만 요금이 엄청나게 싸니 간사이 패스만 있으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교토나 히메지(姬路) 같은 곳을 가려면 일단 덴노지(天王寺)역으로 가면 간사이공항에서 교토까지 다니는 한 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하루카라는 이름의 특급열차를 탈 수가 있어서 직접 교토까지 가던지, 아니면 신오사카역에서 신칸센을 탈 수가 있었으니.


이 하루카 특급열차는 우리들의 신발 노릇을 톡톡히 해준 것으로, 다리 아프면 그냥 타고 간사이공항에 갔다가 교토로 가기도 하고 그랬다.


왜?


간사이 패스가 있으면 그 기간 내에는 그냥 공짜니까.


이렇게 17일부터 19일까지 긴키(近畿) 지방 여기저기를 다닌 다음 20일 다시 시모노세키로 돌아 올 때 히로시마에 들려 원폭 기념관을 잠시 둘러보았다.


확실히 일본 여행은 최소한 볼거리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기회였다.


둘째 날 들린 오사카성.


그 때는 특별한 지식이 없어서 성보다는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 구경이 더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학생들을 모이게 할까 이것이 궁금했는데 우리와 많이도 달랐다.


군대 문화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노출이 되어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 기회가 되었으니.



오사카(大阪)성


도요토미 집안과 함께 사라진 전국 시대(戰國 時代) 마지막 격전의 무대

성의 전신이었던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는 농성전으로 노부나가와 계속해서 싸웠다.


옛날, 오사카(大坂)가 이시야마라고 불린 것은 쇼토쿠 태자가 수도를 만들 때 돌을 두었던 곳이라고 해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1496년, 은거지로서 이 땅에 스님들 숙소를 지었던 혼간지파 일향종의 연여(蓮如) 스님은 [호랑이나 살까, 집 하나도 없이 밭밖에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곳]이라고 썼다. 아주 조용했던 땅이었던 것 같다. 혼간지가 세워진 것은 1533년의 일이었다. 이시야마혼간지라고 불렸던 이 절은 노부나가(信長) 공기(公記)에 의하면 완전히 성곽화되어, 현재 오사카성에 필적하는 경의적인 크기였다고 한다.

혼간지와 노부나가가 대립한 이사야마 전투는 1570년부터 10년간 계속되었지만, 그 중 4년이 농성전이었다. 노부나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1580년, 화의가 체결된 뒤 혼간지는 불타버리고 만다. 혼노지의 변은 2년 뒤의 일이었다.


유능한 리더가 없었던 이유로 난공불락의 성과 도요토미 집안은 멸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3년, 이시야마 축성에 착수한다. 2년 뒤에 성곽은 거의 완성이 되었다. 산노마루가 완성된 것은 1598년이었다. 성을 감싸는 누벽은 약 4 km에 이르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남겨진 문제는 도요토미 집안의 처우였다. 이에야스는 신하의 예를 기대했지만,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는 태합(太閤)시대의 재현을 꿈꿀 뿐이었다. 이 총대장은 장신의 남아였지만, 거의 성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시세를 판단할 수 있는 유능한 가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70세를 넘긴 이에야스는 더 기다리지 않고, 교토 호코지(方廣寺)의 범종에 쓰인 명문을 트집 잡아서 오사카로 출진한다.

1614년 11월, 겨울의 진은 수상교통의 요충 에타가자키(穢多ケ岐)의 국지전으로 시작되었다. 7일 뒤에는 시기노(鴫野), 이마후쿠(今福)의 성채를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등이 습격하고 고토 마타베(後藤又兵衛)등이 이에 대해 응전하면서 최대의 격전이 된다. 히데요리의 가신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가 입안한 성 밖 성채에서 싸우는 작전은 수비범위가 너무 넓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측은 완전한 농성전 태세로 들어갔다. 성 밖에 있던 것은 7천의 이끄는 사나다 유키무라(眞田幸村)였다. 가장 방위에 약한 성 남쪽에 사나다마루(眞田丸)라고 부르는 방위진지를 구축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12월 4일에 이곳을 공격한 마에다 토시쓰네(前田利常)군은 완패한다. 그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천왕산(天王山) 츄스야마로 본진을 옮긴다. 이에야스는 사치무라를 10만석으로 주어 자기편으로 오도록 설득했지만, 사치무라는 이를 거절한다. 성 안까지 터널을 뚫으려고도 했지만 이도 실패했다. 대포를 쏠 수밖에 없었지만, 위력이 약해 혼마루까지 이르지 못했다. 남은 것은 강화책밖에는 없었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히데요리 가신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樂齊)를 조종해 화평교섭에 성공한다. 히데요리는 정전을 거부했지만, 어머니 요도기미(淀君)에게 눌렸다. 사치무라는 이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전국 세상에 종지부를 찍은 여름의 진.


명장들은 3일간의 전투로 사라졌다.


화평안의 하나는 바깥 해자를 매우라는 조항이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안쪽 해자도 매워버렸다. 이 심한 위반에 도요토미 측은 격노하고 재전의 준비를 시작한다. 이것을 구실로 이에야스도 전투의 준비에 착수한다. 1615년 5월 5일, 교토 니조(二條)성에서 출진할 때 이에야스는 [이번에는 3일분의 식량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고 자신도 실천한다.

다음 날 6일, 강행군으로 가와치(河內 ; 일본의 옛 지명, 현재의 오사카 부(府) 동쪽)의 고쿠분(國分)까지 진격해있던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松平忠明),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등 도쿠가와군의 세력은 3만 5천, 이에 상대하는 것은 3천을 이끄는 고토 마타베(後藤又兵衛)였다. 원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마타베는 이런 조건에도 7시간에 걸쳐 싸운 뒤 전사했다.

같은 날, 야오와카에(八尾若江)방면에서도 기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의 도요토미군과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의 도쿠가와군이 사투를 벌린 결과, 도쿠가와군이 승리했다.

그리고 다음날 5월 7일이 결전의 날이 되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를 츄스야마의 진에서 맞으면서, 이 결전에 총대장인 히데요리도 참전하도록 전했다. 도쿠가와군은 15만, 도요토미 측 사나다 유키무라와 모리 가츠나가(毛利勝永)군 5만 5천, 유키무라는 이에야스의 본거지를 향하여 마왕(魔王)처럼 돌진했다. 이 위세에 이에야스도 한 때 패전으로 자결을 각오할 정도였다. 그러나 유키무라도 힘이 다하고 목이 잘린다. 히데요리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유키무라는 아들 다이스케를 성안으로 보내어 히데요리를 자결시키고자 했었다. 오사카성이 함락되어 화재가 일어난 것은 유키무라의 죽음으로부터 2시간 정도 뒤의 일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자결한 것은 다음 날 8일이었다.

이에야스가 말한 대로 여름의 진은 3일로 끝났다. 양군의 전사자는 3만에 이른다.


단지 도쿠가와 집안의 권세 과시를 위해 재건된 오사카성의 그 뒤.


이에야스가 슨푸(駿府)성에서 75세의 생애를 마친 것은 다음 해 4월이었다. 생애 마지막에 새로운 축성을 금지하는 [일국일성(一國一城)]을 발표했다. 그 뒤, 오사카성의 대 개축과 몇몇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새롭게 지어진 성은 없다. 오사카성의 재건은 1620년에 시작하여 1629년에 끝난다. 공사는 2대 쇼군 히데타다(秀忠)부터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으로 이어졌다. 이제 전쟁의 요새로의 기능은 없어졌고, 성은 다만 도요토미 시대에 뒤지지 않는 도쿠가와의 위세를 나타내는 것이면 족했다.

그 뒤 1665년 낙뢰로 소실된 성이 겨우 재건된 것은 1848년에 되어서부터이다. 현 천수각이 복원된 것은 1931년이었다. [세키가하라]로부터 15년 뒤, 천하를 결정한 전장이었던 [오사카성]은 현재 대도시의 한가운데 파묻혀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난공불락의 성


겨울의 진에서도 파괴되지 않은 소가마에(總構 ; 전체적인 방어라인)는 히데요리의 탄생과 함께 만들어졌다.

오사카성의 대규모 축성에는 히데요시 아래의 무장과 기술자들이 많이 동원되었지만, 선교사 프로이스는 약 40일간에 7천호의 집이 세워졌고, 5만 여의 사림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보고했다. 많을 때에는 10만 명이 종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요도카와(淀川)의 수리 시설을 이용해서 석재, 목재가 운반되어, 오고가는 배는 1일에 200척부터 1,000척에 이르렀다.

인접한 사카이(堺)등에서 상인이 이주하여 죠카마치(성 아래 마을)를 만들었다. 히데요시가 살아 있을 때 오사카의 인구는 10만 명을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죠카마치를 휘감은 소가마에는 1594년에 완성되지만, 히데요시는 그 전 해에 요도기미가 임신한 상속자 히데요리의 장래가 걱정되었던 것 같다. 병으로 죽기 직전에 산노마루 구축을 명한다. 니노마루의 해자 바깥쪽과 소가마에의 안쪽에 있었던 주택 1만 7천 칸은 강제 퇴거되었고, 바깥에는 겹 해자가 구축되었다.

확장된 소가마에는 겨울의 진에서 20만 가까운 대군의 공세에도 견뎠다. 도쿠가와군은 니노마루는 말할 것도 없고 소가마에의 안쪽도 들어오지 못했다. 이 방어라인을 무너뜨린 것은 어이없게도 히데요리였다.


거석(巨石)의 이모저모


막부의 생각을 잘 따르기 위해 다이묘들은 거석을 운반했다.

도쿠가와가 도요토미 집안의 옛 자취를 지워 없애는 것처럼 다시 지어진 오사카성에는 거대한 돌이 많이 사용되었다. 최대의 다코이시(蛸石)은 36첩(疊 ; 다다미, 1개의 크기는 대개 너비 90㎝, 길이 180㎝이다) 정도이고, 히고(肥後)석은 33첩 분의 크기였다. 이것의 운반이나 쌓기의 기술은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공사에 내몰린 도자마(外樣) 다이묘들이 필사적으로 연구를 한 결과 운반되었을 것이다. 도요토미 집안이 사라지면서 전국의 시대는 모두 끝나고 시대는 변했다. 어떻게든 도쿠가와 막부의 마음에 들려는 생각에서 그들은 다투듯이 눈에 띠는 거석을 쌓아 올린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사나다 유키무라의 최후


유키무라에게 오사카 진은 이에야스 타도만이 목적이었다.

유키무라의 아버지 마사유키(昌幸)는 우에다(上田)성의 전투와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두 번이나 도쿠가와군을 쳐부수었지만, 서군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이에야스에 의해 부자는 기슈(紀州) 쿠도(九度)산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한 번 더 도쿠가와와 싸우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마사유키는 세상을 떴다. 그 3년 뒤, 오사카 진이 시작된다.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등성한 유키무라는 성 밖에 [사나다마루]를 쌓아 자신이 최전선에 섰다. 유키무라에게 오사카 진은 숙적 도쿠가와와의 결투와 다름없었다. 겨울의 진에는 도쿠가와 군세의 5명 가운데 4명이 사나다마루의 공방에서 목숨을 잃었다. 승전이었는데도 정전에 응한 도요토미 상층부를 유키무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화해 직후 이에야스의 암살 계획을 올렸지만 일축되었다. 유키무라는 ‘도요토미 집안도 2대에서 망하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결사의 각오로 이에야스를 쫓은 유키무라는 죽은 아버지와 함께 싸운 것이다.


유키무라 집안의 문장은 육문전(六文錢)이다. 전장에서는 죽을 각오로 싸운다는 ‘사나다 다마시(魂)’가 잘 나타나고 있지만, 여름의 진에서의 유키무라는 참으로 사나다 다마시 그것이었다. 도쿠가와 군을 협공하여 기습을 가하는 작전은 히데요리가 성안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다. 완전히 승기는 잡지 못했지만, 붉은 투구의 사나다대는 이에야스 본진으로 돌진한다. 큰 혼란에 빠진 이에야스는 본진으로부터 삼리를 도망쳤다고 한다. 도쿠가와 군기가 전장에서 쓰러진 것은 미카다가하라(三方原)의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패한 이후 처음이었다. 이에야스의 목은 취하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몰아 제킨 것으로 유키무라는 아버지 이상으로 유명해지지만, 아버지 마사유키의 사슴의 뿔로 장식된 투구를 쓴 유키무라는 죽은 아버지와 함께 싸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요토미 집안의 최후와 요도기미


요도기미의 억센 성격이 부른 도요토미 측의 비극적인 최후


히데요시가 측실 가운데에서도 요도기미를 총애한 것은 유명하다. 아자이 나가마사(淺井長政)와 노부나가 누이동생 오이치(お市)의 사이에서 태어난 요도기미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후계자의 어머니로서 제멋대로 굴어서, 본처인 키타만 도고로(北政所)가 화를 낸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녀는 요도기미의 적인 이에야스 측에 붙었다.

1605년, 이에야스는 2대 쇼군 히데타다로의 축하 인사를 히데요리에게 촉구했다. 쇼군직은 도쿠가와 집안의 세습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지만, 요도기미는 격앙해서 이를 거부한다. 축하 인사를 했더라면 서국의 제일 큰 다이묘로서 도요토미 집안은 존속했을 것이다. 요도기미는 ‘축하 인사를 할 바에는 히데요리를 죽이고 자살하겠다고 날뛴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집안 타도의 결의를 굳혔다고 한다. 겨울의 진의 정전을 주장한 것도 요도기미였다.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던 도요토미 측은 그녀에게 놀아나 갈 바를 몰랐다. 억세고 허영심이 강하고 히데요리에게 집착했던 요도기미는 도요토미 집안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이 모자가 함께 최후를 맡은 때, 히데요리는 23세, 요도기미는 49세였다.


메이지 이후의 오사카성


오사카 환도는 꿈으로 끝나고 성은 군대의 시설로 용모를 바꾸다.


1870년 8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오사카 환도론[大阪還都論]이라는 제안서를 신정부에 제출하여, 인심의 쇄신을 꾀하려했다. 그것이 채용되었더라면 당연 오사카성이 황거(皇居)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강하게 반대한 것은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였다. 오사카는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이었지만, 에도는 [정치라는 지지대 없이는 쇄락은 피할 수 없는 정치 도시]라는 것이었다. 오쿠보는 제안서를 거둬들였다.

같이 오사카에 주목하고 있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 ; 사실상 근대 일본군의 창시자, 야스쿠니 진자 앞에 세워진 동상의 주인공)는 정부 직속의 군을 오사카에 둘 것을 설파하여, 성 안팎에는 육군의 시설이 집중되게 되었다. 청일, 노일전쟁의 시기에는 오사카는 군사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태평양 전쟁 때에는 미군의 표적이 된다. 소와 20년 8월 14일 오사카 공습에서 성에 떨어진 폭탄은 700톤이 넘었다고 한다. 천수각과 기슈고덴(紀州御殿) 그리고 현재 시립박물관이 되어 있는 중부군구 사령부 건물만이 기적적으로 남겨졌다. 전후 미군이 성내에서 철수한 것은 소와 23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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