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성을 가다

2. 도쿄 에도(江戶)성

정안군 2012. 7. 27. 13:22


에도성

에도성터를 이렇게 걸었다.


1999년 7월 31일부터 8월 3일까지 온 가족이 함께 여행사를 통해 일본 도쿄 일대를 다녀왔다. 그 가운데 하루인 8월 2일은 하루 종일 도쿄 디즈니랜드를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 때 중학교에 다니던 큰 아들 담임선생님이 도쿄에 체재하고 있었다. 인심도 쓸 겸 디즈니랜드는 담임선생님에게 양보를 하고 나는 야스쿠니진자와 도쿄 에도 성터를 보기 위해 혼자 나선다.


무지 더운 도쿄의 날씨 속에서 소기의 목적은 거두었지만, 저녁에 다시 만난 집사람에게 엄청나게 눈총을 받았던 날이기도 했다.


감히 마누라를 혼자 두고 나돌아 다니다니 혼나도 싸지.


숙소는 신주쿠(新宿)역 근처 게이오(京王) 플라자 호텔이었는데, 여기서 신주쿠역까지는 그다지 멀지가 않다. 슬슬 걸어서 신주쿠역으로 가는데, 멀리서 봐도 그 크기가 엄청나다. 사람의 통행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아무튼 이 엄청난 신주쿠역에서 도에이(都營) 신주쿠선을 타고 구단시타(九段下)까지 일단 이동을 한다. 일본어를 하기는 하지만 모든 국민들을 초등학생 정도로 생각하는 일본 사회는 일본어를 사용하여 물어볼 것도 없이 안내판만 보면 쉽게 이동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도에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지하철도 서울시가 운영하는 노선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도쿄도(都)에서 운영하는 회사라는 뜻일 것 같다.


구단시타라는 곳에서 내리면 주변이 좀 경직된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일본인들은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산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시설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멀지 않다.


신사 안에는 가미가제 특공대원이었던 동상도 있지만 이렇게 사람만이 아니고 각종 동물도 등장하는데 말 동상도 있고, 개새끼 동상과 통신용 비둘기 동상까지 있다. 개새끼와 말과 비둘기의 영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동물들의 위령비까지 세울 정도의 자상한(?) 놈들이 남의 나라에서 끌어가서 죽게 만든 일에 대해서는 왜 그리 박한지 모르겠다. 하긴 그러니 나쁜 놈들이지 달리 나쁜 놈들인가. 하여튼 일본 신사 특유의 으스스한 분위기에 고전적인 일본 군가를 입은 늙은이들과 얼빠진 놈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신사 옆에 있는 유슈간(遊就館)에 들어가 보면 더 가관이다. 가미가제 공격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비행기와 각종 무기들을 보면 왜 그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나오면서 생각나는 것은.


공짜도 아닌데 괜히 봤어.


더러운 기분을 떨쳐버리고 다음은 에도성터 구경에 나선다.


물론 에도성에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해자와 석축 그리고 대문 몇 개만이 남아 있다. 또 에도 성터 한쪽은 일본 왕궁이 자리 잡고 있어서 다닐 곳도 제한이 되어 있고.


원래 일본 왕이 살던 왕궁은 원래 교토에 있었지만, 쇼군 체재가 무너지면서 쇼군의 상징이었던 에도성에 일본왕이 옮겨 살게 되면, 일본 백성들에게 누가 실권자인지를 확실히 알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이른바 조정에 붙은 측의 속셈이 있었던 것.


조정에 붙은 세력은 지금의 야마구치현인 죠슈와 가고시마현인 사쓰마가 중심이었다.


이들은 도쿠가와 막부에게 철저히 물먹은 곳이라서 원래부터 불만이 많던 곳이었고.


뒤에 죠슈 세력은 육군을, 사쓰마는 해군을 손아귀에 넣게 되는데, 소선은 육군 출신이 총독으로 오는 통에 야마구치 출신들이 있었고, 대만은 해군 출신이 총독으로 갔기 때문에 사쓰마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데라우치(寺內)라는 인간은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시절 초대 총독이었는데, 이 인간이 바로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일본 왕은 허우대만 멀쩡하지 정치에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쇼군을 타도하기 위해 일본 왕을 이용한 것이지, 정말로 일본 왕에게 권력을 돌려주기 위해서 쇼군을 타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전안문(田安門)에서 일본 무도관(武道館)이 있는 기타노마루(北の丸)로 일단 들어간다.


무도관은 1964년 일본이 올림픽을 개회했을 때, 유도 종목을 실시하기 위해 세운 다목적 시설인데, 바깥 모습은 일본 전통 양식을 하고 있다.


나라현에 있는 호류지의 유메도노를 본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호류지라 하면 일본에서 명군으로 이름난 쇼도쿠 태자가 지은 절로 알려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와의 관계도 깊다고 하는 절이다.


아마도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경제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일본은 이 무렵에는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던 중이었나보다.


한 동안 유럽에서 배운다고 유럽의 기술자들을 들여와 열심히 유럽 각종 건축 양식 경연장이 되다시피한 일본이었지 않은가.


그 덕에 우리나라에도 조선 총독부나 서울역, 서울시청 등 유럽 건축 양식이 소개되는 영광(?)도 함께 얻었지만.


또 무도관 근처에는 과학기술관과 국립근대미술관도 있다하나, 오늘은 일정도 만만치가 않으니 그냥 패스하는데 하기는 엄청난 햇빛 속에서 잠깐씩 그쪽으로 이동하며 구경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옛날에는 엄청난 크기의 난공불락의 요새였겠지만 도쿠가와 집안의 주인이 쫓겨나고는 이런 시설 저런 시설이 들어서 에도성은 애초보다 많이 규모를 줄였다. 그리고 공중으로는 도시 고속도로까지 놓이고.


이런 모습을 에도성을 만든 도쿠가와 막부의 창시자 이에야스가 다시 살아나서 본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해자에 놓인 다리를 건너서 혼마루(本丸)터로 간다. 혼마루 터에 들어서면 바로 천수각 터가 보인다.


천수각도 처음 세웠을 때에는 엄청난 규모였다고 하나 바로 소실되어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지금은 이렇게 터만 전한다.


앉아서 쉬면서 분위기를 조금 느끼고 싶어도 쉴만한 장소도 없고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더 있기도 무리였다.


설렁설렁 엄청났던 석축만 확인하고 오테몬(大手門)을 나서니 도쿄역이 멀지 않은 곳이다.


이봉창 의사가 일본 왕을 노리고 수류탄을 던졌던 사쿠라몬(櫻田門)과 김지섭 의사가 폭탄을 던졌다는 니주바시(二重橋)도 이곳에서 멀지 않았지만, 벌써 온 몸은 땀으로 절고 얼른 시원한 곳으로 가자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에도성은 이렇게 정리한다.




에도(江戶)성


에도 역사의 축도(縮圖)는 일본 제일의 명성(名城)에 있다.


도쿠가와 권력의 강함을 보여 얻은 최고 기술을 구사한 명성


우리 암자는 소나무밭에서 이어진 바다 부근


닿을 수 없는 높은 봉우리를 처마 끝에서 본다.


이 구절은 1464년 최초의 축성자 오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를 알현한 때, 후지미야구라(富士見櫓)에서 본 경치를 노래한 것이다.


그러한 에도도 축성 전에는 갈대가 무성한 무사시노(武蔵野) 대지가 펼쳐진 시골에 불과했다. 그러나 가마쿠라(鎌倉), 우라와(浦和)에 비해 영

내의 발전성, 수운의 편리 등을 들어 에도를 선택한 이에야스는 덴카부싱(天下普請 ; 전국의 모든 다이묘에게 역할을 할당해서 성을 쌓도록 한 것)으로 본격적으로 정비해서 대규모 죠카마치(성 아래 마을)를 조성한다.


혼마루는 각 다이묘의 역할 분담으로 만들어졌다. 높이 약 44.8 m, 오층, 지하 1계의 천수각은 성곽 사상 최대의 것이었다고 한다. 혼마루 입구 부근에서 볼 수 있는 거석을 기리이시(切石 ; 정육각체로 자르는 석재)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하기(萩) 방식의 석축 쌓기. 시오미자카(汐見坂) 부근의 큰 돌을 사용한 노즈라쯔미(野面積 : 자연석을 쪼개서 쌓아올린 방법)의 석축 쌓기. 그 기리이시와 자연석을 사용하는 방법 하나만 보아도 당시 일본 최고 기술이 구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도성은 도쿠가와 권력의 강함을 항시 보여주는 성,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사람을 지배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후지미야구라에 맡겨진 이루어지지 못했던 꿈 이야기


1868년 3월 14일, 에도성 총공격 전날 밤, 수천 명의 구 막부 신하들이 다음 날의 결전에 대비해서 긴박한 공기가 흐르고 있던 에도성에 ‘총공격 중지’의 소리가 들려왔다. 총공격을 막는데 성공했던 뒤에는 한 남자의 존재가 있었다. 그 이름은 가쓰 가이슈(勝海舟). 일설에 의하면 가쓰는 사전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친밀한 관계였던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Harry Smith Parkes)에게 근신하고 있는 요시노부(慶喜)를 치려고 하는 것은 ‘만국공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사이고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가쓰의 넓은 인맥과 안목에 의한 무혈 개성이었다.

다만, 그 때 당시의 쇼군 요시노부의 모습은 벌써 그곳에 없었다. 260여 년간, 일본 정치의 중축이었던 에도성은 옛적 ‘권력의 상징’으로서의 모습은 없었고 성주 부재인 채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도칸은 옛날 ‘후지미야구라’를 축성할 때, ‘정승헌(靜勝軒)’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정승헌은 중국 병서 ‘울요자(尉繚子)’의 ‘병(兵)은 정(靜)으로 이긴다.’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생각은 에도성 역사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이로(大老 ; 쇼군을 보좌하던 최고 행정관) 습격 전날 밤


각오를 다진 밤


시나가와(品川)의 요정 사가미야‘相模屋)’에는 세키 데츠노스케(關鐵之介)이하 17명의 미토(水戶)의 낭인들이 모여서, 습격을 앞두고 연을 벌이고 있었다. 습격은 상대는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나오스케는 천황의 재기를 받지 않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한다. 그것을 들은 전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濟昭)등은 불시에 성으로 가서 나오스케를 추궁하지만 그것을 기회로 나리아키는 영구 칩거를 명받는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해왔던 미토번에게 나오스케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860년 3월 3일 많은 눈이 내린 사쿠라다(櫻田)문 밖에서 행동에 옮긴다. 그들 중에는 전날 밤 연이 이승에서의 결별 연이었던 자도 있었다.


붉게 물들었던 사쿠라다 문의 눈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의 최후


1860년 3월 3일은 이른 아침부터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히코네(彦根)번 가미야시키(上屋敷 ; 다이묘가 평상시에 살았던 집)의 문이 열린 것은 오전 9시. 이이 나오스케를 태운 가마가 26명의 호위 무사에 의해 사쿠라다 문으로 향하고 있던 그 시간, 한 명의 남자가 행렬을 향하여 칼을 뽑았다. 계속해서 나오스케를 노리고 권총이 불을 품어, 호위 무사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연이어서 가마를 습격하던 폭도들은 나오스케를 끌어내어 머리를 베었다. 안세이(安政) 대옥(大獄) 사건에 반발하던 미토번의 탈번 무사에 의해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뒤에도 사쿠라다 문 밖에는 붉게 물든 눈을 덮어 감추려는 듯이 흰 눈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에도성


1457년, 오우기가야츠(扇谷) 우에스기(上衫)씨의 가신이었던 오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축성한 것을 원형으로, 도쿠가와씨의 덴카부싱(天下普請)에 의해 오늘날 볼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총면적은 약 264만 평방 미터, 외곽을 생각하면 치요다(千代田)구 거의 전체에 해당할 정도 광대한 부지이다. 현재 일부는 천황의 주거지가 되었고, 비공개 부분이 있지만, 혼마루, 기타노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은 공개되고 있다. 또 1638년에 완성된 간에이(寬永) 천수(天守)의 높이는 약 44.8 m로 사상 최대의 천수이었지만, 메이레키(明歷) 대화재로 소실된 뒤 재건되지 못해 현재에는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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