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여행 1998

[일본여행] 하기(萩 Hagi)에서 후쿠오카로

정안군 2018. 9. 6. 20:42

하기에서.

 

저녁에는 에어컨이 그냥 저냥 시원해서 잘 잤는데, 새벽이 되니 점점 더 더워집니다.

에어컨이 작동이 안 되네요.

전기료 아까워 주인이 껐나 봅니다.

하여간, 이래저래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일본인들은 대단합니다.

더워 더 누워 있기도 그래서 아침 산책 겸해 근처에 갈만한 곳이 있나 찾아 봤는데.

마침 안성맞춤인 곳이 있네요.

순교자 기념공원.

순교자라.

일본도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죠.

우리나라 천주교 박해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얼마 전 도쿠가와가의 에도 막부 시절 극심했단 기독교 탄압에 저항했던 신자들이 남긴 흔적들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세력이 제법 컸던 나가사키 일대입니다.

그 혹독했던 탄압 속에서 지도자도 없이 몰래 신앙을 지킨 이들이 남긴 그 발자취는 사연을 알면 알수록 눈물 겹습니다.

 

기념공원은 걸어서 5분 거리의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찾는 이도 거의 없어 보이는 아주 한적한 곳이더군요. 


 

 

 

 

 

안내판이 있어 읽어 봅니다.

 

크리스천 순교자와 기념비


메이지 원년(1868)에서 메이지 3년에 걸쳐 정부는 그리스도교 탄압 정책을 취해, 나가사키 우라카미(浦上)마을의 전체 신도 3800명을 전국 각지로 유형을 보냈다.

이것이 소위 <우라카미 말살>이다.

이 중 약 300여 명이 하기에 보내졌다.

신앙심 깊은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삼 년간 계속된 가혹한 고문과 굶주림 때문에 40 여명이 영웅적인 순교를 하였다.

그 중 20 여명이 이곳에 매장되었다.

그때의 박해와 인고의 흔적을 기려, 하기 천주교회 초대 사제 비욘(Villon)신부는 메이지 24(1891) 신도가 유폐되어 있던 이 이와쿠니(岩國) 집터에 나돌아 다니던 정원석을 모아 그것을 기초로 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천주께 신앙을 지켰던 분들)이라는 비문을 새겼다.

또 여기에는 게이초 10(1605)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한 모리 번의 중신이었던 부젠 수령 구마가야 모토나오(熊谷元直)의 비도 있다.

하기 천주교회.

 

읽을수록 애틋한 사연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 분들을 위해 잠시 기도를 드립니다.

, 주여.

그런데 이것에 나만 있나 했더니 다른 존재들이 있었네요.

그것은 모기떼.

이 친구들, 그동안 얼마나 굶주렸던지 정신없이 대드는 통에 숙연했던 마음을 얼른 지우고 되돌아섭니다.

나는 정말 모기가 싫습니다.

 

숙소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미리 주문해 놓은 것인데, 여자 청년 세 명과 우리 가족이 주인공이었습니다.

밥은 밥통에 들어 있으니 먹고 싶은 만큼 퍼서 드시고 국도 그렇게 먹어도 된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찬.

이건 병아리 모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더군요.

김은 아주 작은 조각 넉 장.

그 크기가 우리 큰 김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또 반의 반의 반이나 되나요?

다른 반찬도 달착지근해서 먹기도 힘든 장아찌 종류가 눈곱만큼.

이렇게 먹고도 사나 싶더이다.

 

아무튼 이제 하기를 떠납니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끌려 온 조선 도공들의 후예들이 운영하는 도자기 공방이 있다 하던데 시간과 날씨 때문에 더 이상 미련을 남기지 않고 뜨기로.

날이 좋을 때 오면 꽤 좋을 곳인데, 당최 더워서 좋은 인상은 많이 남기진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순교자 기념공원은 참 인상 깊었습니다.

 


고쿠라(小倉)로


다마에역까지 이동하여 조금 기다리다 시모노세키에서 올 때 역순으로 기차를 탑니다.

나카토에서 갈아 타고 고구시에서 다시 갈아타고.

시모노세키에서는 일단 고쿠라까지 갑니다.

고쿠라는 기타큐슈의 한 지명인데 기타큐슈는 고쿠라와 몇 근처 도시를 합하여 만들어졌다는군요.


이차대전 중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린 미국은 다음 투하지로 고쿠라를 선택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날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자 다음 목표였던 나가사키에 떨어뜨렸다고.

날씨가 많은 생명을 구하고 잃게 한 셈이지요.

그만큼 중요한 목표물이 될 정도로 고쿠라는 당시 큰 공업지대였다는군요.

 

시모노세키에서 고쿠라는 바다를 건너가지만 기차는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순식간에 혼슈에서 규슈로 이동합니다.

규슈의 입구인 고쿠라는 역의 크기부터 시모노세키와는 완전 다릅니다.


 

고쿠라 성이 가까이 있기에 구경 차 나와 역 건물을 보이 건물이 미래 공상 만화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크기도 엄청나지만 그 가운데 모노레일이 있어 색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 역사도 크기가 만만하지 않지만 저 때는 저 모습이 꽤 충격이었네요.

커도 엄청 커...

거기다 모도레일까지...


 

고쿠라 성까지 사부작 사부작 걸어서 가 보는데, 이 성은 재건한 것이라 좀 품격이 떨어지더군요.

내부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해서 망설이다가 들어가 보기는 하는데, 크게 구경거리는 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일본 역사나 성에 대해 지식이 별로 없어서 흥미가 덜 했나 봅니다.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를 보고 나니 고쿠라나 후쿠오카에 대해 흥미가 생겼는데, 이건 최근의 일입니다.

 


다시 후쿠오카(福岡)로 향하다


다시 고쿠라역으로 돌아 와서 후쿠오카로 향합니다.

신칸센이나 특급은 비싸고 하니 일반 열차와 요금이 같은 급행열차를 타기로.

이 급행열차는 중간 중요한 역만 쉬어 조금 빠르게 갑니다.

고쿠라에서 후쿠오카까지는 난개발인지 우리나라 수도권의 모습이었습니다.

한적한 곳은 거의 없고 잡다한 것들이 잔뜩 들어 선.

 

한참을 달려 후쿠오카에 도착을 합니다.

후쿠오카는 임진왜란 당시 적장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前)이 영주로 있던 도시입니다.

군사 칸베에 마케팅으로 구로다 집안이 후쿠오카에서 상품화 되었다고 하네요.

아무튼 모리 동네에서 구로다 동네로 넘어 온 셈이지요.


 

후쿠오카는 역 이름을 후쿠오카역이라 하지 않고 하카다(博多)역이라 합니다.

본래 상인이 살던 하카다와 무사 계급이 살던 후쿠오카 두 지역을 하나로 합치면서 도시 이름은 후쿠오카로 하고 그 대신 역과 항구는 하카다로 정하기로 했다고.

고쿠라도 정신없었지만 하카다 역은 한 술 더 뜹니다.

꽤 복잡하더군요.

나중에 가게 되는 오사카나 도쿄 신주쿠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때는 그랬습니다.

.

 

숙소는 역사에서 멀지 않은 그린 호텔이라는 곳을 선택합니다.

역에서 걸어 2 - 3분이면 도착하는 아주 지척입니다.

일본은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차비나 숙박비를 보면 정말 입이 떡 벌어집니다.

어른 한 명에 아이 두 명이라 투윈을 선택했는데 요금이 9800.

우리 돈으로 무려 98000원이었어요.

이게 지금부터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배당받은 방은 깨끗하고 잘 꾸며져 있기는 한데 그 크기가 정말 작았습니다.

침대 말고는 공간이 거의 없어요.

화장실도 큰 박스를 설치한 듯 너무 답답했고.

그래도 필요한 건 다 있더군요.

역시 일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쉬다가 후쿠오카의 명물인 캐널시티를 가 보기로 합니다.

지도를 보며 찾아가니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고 캐널시티에 가서 참 많이 놀랍니다.

건물이 한 동, 두 동 이렇게 따로 있기는 한데 이것들이 한 지붕 아래 있는 구조였어요.

내가 생각했던 건물 배치를 뛰어 넘는 구조.

참 신기했습니다.

캐널시티라는 이름에 걸맞게 중간에 캐널(운하)을 설치해 특이한 모습을 보였고.

나중에 더 자세히 보기로 하고 돌아옵니다.

오다가 역 구내에서 하카다 라멘에 도전을 해 보는데.

나는 돼지고기의 역겨운 냄새 때문에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 다른 걸 시켰는데, 우리 두 아들들은 너무 맛있다고.

먹어 볼 걸 그랬나 싶던데 그래도 그 냄새가 일단 너무 역겨워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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