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부여 이야기

충효로 지낸 어느 하루

정안군 2021. 2. 27. 18:39

 

 

두환이가 대빵이 되고 나서 좀 멋적었던지 갑자기 사람이나 된 것처럼 하고는 떠든 게 충효 사상이다.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
여기서 나라는 바로 나 두환이니 찍소리말고 살아라는 게 두환이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환아 생각 좀 해 봐라.
너 같은 놈이 대빵이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겠니?
지금 미얀마가 그 짝이다.
두환이 같은 미얀마 군바리 대빵 놈이 없어지라고 외치는 게 미얀마 시민들의 나라 사랑이니 군바리들이 생각하는 나라 사랑과는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는.
요즘 같이 우리나라 정도는 되어야 저절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태극기,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애국을 외치는 노인분들이 많은 걸 보면 그렇지 않을까 싶다만.

 

며칠 전 부여에 다녀 왔다.

긴 세월의 흔적을 매듭짓기 위해서.

일본말로 우마레 소다치 후루사토인 부여는 아버지의 묘가 있으므로 그동안 연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그 연이 지워져 버렸다.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하기로 했던 아버지 묘를 자연으로 이장시켰기에.

마지막이 될 아버지 묘 앞에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갑자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교회 산에 묘를 쓰게 되고.

교회 산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서 아버지 묘를 이장했다.

그리고 거의 30년.

주로 내가 벌초를 담당했고 가끔은 묘 근처에 사시는 외삼촌 친구분이 해 주시기도 했다.

두 아들이 번갈아 하기도 했고 외국에 사는 동안은 대행하시는 분께 맡기기도 했다.

그게 벌써 50년 가까이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내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할머니 묘를 자연으로 돌려 버리셨다는 말을 듣고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나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내 자손들이 옛 세월의 흔적에서 자유롭도록.

아버지 장사를 치르려고 산에 갈 때는 들국화가 여기 저기 많았는데 그 흔적을 지우려 할 때는 아직 봄의 색도 없는 시절이다.

꽃피는 봄에 보내드리면 더욱 좋겠지만 지금 무채색의 계절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듯.

그렇게 아버지는 자연으로 흙으로 돌아 가셨다.

 

생각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 오다가 천안 목천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들렸다.

충주에서 부여를 갈 때에는 증평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서청주에서 나와 조치원과 공주를 거치곤 했는데 이제는 중간에 세종시가 생기기도 하고 교통량이 많아져 그 길은 더 이상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은 증평에서 오창 천안 고속도로를 탄 다음 논산 고속도로를 이용한다.

하긴 몇 번 그렇게 간 적도 없긴 하다.

그리고 이제 부여와 마지막 연이 끊어지면서 별로 갈 일도 없게 되었다.

아무튼.

모처럼 가 본 독립기념관은 한척해 좋았다.

가기 전에 물론 병천 순대거리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독립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들어가는데 뭔가 배치가 좀 불편하게 느껴진다.

친근감이 없고 그저 공허함만이 남는다.

코로나 때문인지 유람차도 다니지 않으니 전시관도 너무 멀게 느껴진다.

바람이 불면서 태극기 광장의 태극기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아내는 이제 큰며느리 역할이 끝났다고 하고 나도 이제 장남의 역할이 끝났다.

이제는 충도 충분하고 효도 충분히 했다는 생각만 남는다.

충효, 그래 이제 많이 했다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