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2013 여행

전쟁의 기억 속으로, 디엔 비엔 푸의 전설

정안군 2013. 5. 4. 23:41

이 도시의 중심 거리 이름 가운데 이 날을 기념한 5월 7일 도로가 있다.

이 날은 베트남군이 마지막 남은 프랑스 요새였던 '드 카스트리에 벙커'를 점령한 날로, 정말 기념하고도 남을 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승리 뒤에 더 대단한 나라 미국과 싸우게 될 줄 그 당시 베트남 지배층이나 백성들은 알았을까?

결국 이 승리는 끝이 아니라 불길한 새 시작의 징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남베트남을 해방시킨 4월 30일이 더 크게 보일 테지만, 이 날도 의미가 없는 날은 아닐 게다.

5월 7일이 머지않았다.

그 때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우기의 시작 징조가 보인다.

이른 새벽이나 밤에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가 그 징조일 텐데, 그 당시 프랑스가 사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해물이 바로 이 우기였단다.

디엔 비엔 푸 전투의 상세 과정이야 인터넷을 검색하면 많은 자료가 있으니 그것에 대한 설명은 내가 능력도 부족하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디엔 비엔 푸에 오면 그 때 유적지가 몇 군데 남아 있는데, 그곳을 직접 가보고 사진과 그 때 느꼈던 생각이나 쓰려고 한다.

 

중심 도로 ㄱ자가 만나는 로터리에 서면 승리의 기념탑이 보인다.

이른 아침에 이곳에 가본다.

입장료 생각을 안 했는데, 지키고 있던 아저씨가 웃으면서 다가와 돈을 내란다.

돈이 한 푼도 없었는데, 그냥 가기도 그래서 아저씨에게 돈이 지금 하나도 없다.

그냥 들여 보내달라고 하니 웃으면서 그러란다.

누가, 베트남 사람들이 네 가지가 없다고 했어?

약간 조잡해 보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부조물이 새겨진 벽체를 오른쪽에 두고 제법 높은 계단을 오른다.



조금씩 오르면 숨도 가빠오지만, 널찍한 평원에 자리 잡은 디엔 비엔 푸의 모습이 발아래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스런 도시인데.

그 놈의 욕심 때문에.

거의 다 올라가면 석비가 새겨져 있는데 유감스럽게 베트남어로만 쓰여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안 되남.

 




 

 

끝까지 오르면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래도 크기가 대단하니 놀라는 척이라도 해주어야지.

와~~~

 

 


 

사실 이 동상보다는 발 아래로 펼쳐지는 도시의 아름다움이 더 눈에 들어 왔다는 거.

동상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내려가는데, 뜬금없이 기념품 가게에서 대나무 물건을 사란다.

이 기념비와 동상을 세운 사람이 부끄러워할까봐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려오는 길은 완만하게 휘어진 길을 이용하면 좋다.

 

다음은 A1 언덕에 가보자.

디엔 비엔 푸 유적지 가운데 제일 볼거리가 생각할 거리가 풍성한 곳이 바로 A1 언덕일 것이다.

이곳도 공짜가 아니다.

3,000동씩 입장료를 내어야 하고, 오후 5시 30분에 문을 닫으니 4시 경쯤 가면 좋을 것이다.

철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작은 기념관이 있는데, 그곳에서 입장료를 받고 표를 내어준다.



이런 분위기에



이런 지도가 걸려있고.



그 안에는 사진과 전쟁에 사용되었던 무기와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띠는 것은 디엔 비엔 푸 전투의 영웅 보 응우옌 잡(Võ Nguyên Giáp 武元甲 무원갑) 장군의 사진이다.

이 분은 지금도 100세가 넘은 나이이지만 살아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또 5월 7일 5시 30분 프랑스 사령관 드 카스트리가 결국 항복하고는 참호 밖으로 나오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프랑스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사진일 게다.

 

 

 

 

그리고 그 다음은 미국과의 전쟁이 끝난 다음 이 전쟁의 영웅들이 이 A1 언덕에 모여서 찍은 사진이다.

 

 

 

 

그들은 해방된 그들의 조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우리도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군과 싸워 이겨서 우리나라를 해방시키고 이런 사진을 찍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지금의 레이디 가카가 이런 벼슬하는 일도 절대 없었을 것인데.

참 부럽고도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 뒤에 숨겨진 많은 이름 없는 무명 병사의 피가 그들을 이런 자리에 세운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장군이 영웅이 되기까지 죽어나간 수많은 병사들.

 

그리고 프랑스 군인들이 사용했다는 총기와 군용 장비들.






참호 아래를 파고는 그 안에 넣어 참호를 무너뜨릴 때 사용했다는 폭약 그림들.


 

다들 한 사연하는 것이다.

 

언덕은 높지 않다.


































사실 디엔 비엔 푸가 평야 지대에 있어서 이곳을 점령하면 도시를 제압할 수 있는 좋은 위치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프랑스군이 알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단다.

이미 베트남군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이 획득한 미군 105mm 곡사포를 넘겨받아서 이 A1언덕이 잘 보이는 뒤쪽 높은 산에 설치를 끝냈던 것.

그렇게 되면 이 언덕은 좋은 위치가 아니라 독안에 든 쥐가 올라앉은 얕은 지점이라는 의미 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이것이 결국 패전으로 이어지는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이 언덕에 올라서면 주위에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베트남군이 고성능 포를 가지고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조망, 참호들, 탱크 그리고 기념비, 위령비.

그리고 명령을 수행하여 이 고지를 점령한 무슨 무슨 부대, 연대, 대대 이름.

 

포탄이 떨어져 생긴 커다란 구덩이.

이 언덕의 나무는 올해도 꽃을 피웠지만, 그 당시 사연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시절의 순리를 따라 꽃을 피웠겠지.

언덕 맨 위에는 전쟁 영웅들이 배경을 삼은 기념비가 있다.

피로 세운 승리의 탑.

뒤에 남은 여운은 길다.

이 A1 언덕의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던 모양이다.

 

이제 갈 곳도 없이 끝까지 몰린 프랑스 외인부대와 목표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베트남 군사들.

마지막엔 백병전까지 갔다고 하니.

결국 이 언덕도 5월 6일에 베트남 군인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적으로 만난 군인들이 작은 언덕에서 얼마나 많이 다른 군인들을 죽였을까?

 

언덕 아래에는 이제 그 때 당시 잡혔던 포로들은 죽거나, 종전 후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구경거리가 된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 중에는 중국군이 포획하여 넘겨준 미군 곡사포도 전시되어 있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 전투의 주역인 프랑스 외인부대는 한국 전쟁 시 큰 공훈을 세운 부대란다.

이 부대에는 당시 한국에서 용병한 한국인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이곳에 와서 남의 나라 군대와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전투를 벌였다고.

뒤에 한국 참전이 이루어지면서 더 큰 판에서 한국인과 베트남 군인이 만나게 되지만 아마도 이 전투가 그 뒤의 참전 예고편이었던 셈.

힘이 약한 나라의 백성이 된 죄로 이곳까지 돈에 팔려 와서 남의 땅에 흙 한 줌을 보탠 사람들.

아, 생각이 많아진다.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는 이 A1 언덕을 나오면, 사거리 건너편에 베트남군 묘지가 있다.

가보지만 길게 늘어진 담 벽에 설치된 세 개의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왜, 못 들어가게 할까?

 

 

 

별 수 없이 담 벽에 설치된 조잡한 조형물 몇 개만 사진에 남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다.

 

 



참, A1 언덕 위에서 베트남군 묘지 안을 볼 수 있으니 그것으로 서운한 것은 면한다.


 

이제 다리를 건너서 땡볕을 한참 걸어가면,

길가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프랑스군 묘지가 나온다.

프랑스와 수교 뒤 이곳에 묻혀 있던 프랑스 군 유해는 모두 프랑스가 가지고 가서 이곳에 남아 있는 프랑스군 유해는 없단다.

 

승자와 패자의 대비가 뚜렷한 곳이 바로 이 프랑스군 묘지이다.

간신히 길가 담 넘어로 조그만 구조물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한참을 돌아서 찾아가긴 했는데,


 

 

어떤 안내판도 없고 문은 그냥 닫혀 있었다.

 


 

그 다음은 여기서 멀지 않은 드 카스트리에 참호이다.

여기는 모옹 탄 구교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탱크가 여기저기 몇 군대 흩어져 있기도 하다.

1954년 5월 7일 오후 4시 30분 베트남 군인이 이 드 카스트리에 참호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이 안에 있던 드 카스트리에가 손을 들고 항복을 하면서 실질적인 디엔 비엔 푸 전쟁이 끝났다고.


 

 

마침 공사 중이었다.

이 뜨거운 땅 햇살에 노출되어 있다가 호강을 하는지 지붕을 덮어주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실제 크기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멀리서 나라오는 베트남 군 포격 때문에 이 안에 갇혀서 지내야만 했던 프랑스 장교들이 불쌍해 보인다.

그나마 여기서 나온 장교들은 대개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랍이나 베트남 현지에서 돈으로 사온 병사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 간 사람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많은 포로들이 부상자들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아마도 베트남 측도 제대로 치료해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먼 포로수용소로 가는 죽음의 행렬로 이어져 많은 병사들이 도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 유적 주변에는 이런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파는 물건을 보면 한숨만 나오더군.

유적과 관련있는 것은 그나마 이것 뿐이고 나머지는 소수민족 의상이나 중국 관광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잘난 조상에 별 볼일 없는 후손인가?




전사학자 마틴 윈드로는 ‘디엔 비엔 푸’ 전투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식민지 피지배 세력이 게릴라전에서 시작하여 정규군으로 무장하여 유럽제국주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라고.


이런 대단한 전투에서 승리한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고, 그 주인공들이 베트남인이다.

 

그러나 인간 개인으로 보면 그들이 흘린 피가 그들 자신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다시 한 번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무옹 탄 구교를 건너 시장을 지나 숙소로 돌아온다.

 

남은 것은 디엔 비엔 푸 박물관과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전쟁 시 머물던 숙소 겸 작전실이 도시 외곽에 있다고 하는데 박물관은 몰라도 그곳까지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일단 박물관은 수, 금, 일요일에 연다 하니 일요일인 내일 아침에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