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땅끝마을까지 輪行記

함열에서 정읍까지 - 뒤

정안군 2006. 3. 26. 21:06

밥을 먹고 나서 결정을 한다.

 

"그래 결심했어.   나중에 어떻게 되든 일단 죽산쪽으로 간다"

 

삼거리에서 죽산쪽으로 과감하게 돌렸는데 참 거지같은 상황이 전개된다.

 

상황 설명

 

1. 좀 지나서 심포쪽으로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트럭이 나온다.

 

2. 트럭이 설 듯하여 앞을 지르는데 또 다시 돌진한다.

 

3. 깜짝 놀라 멈추니 트럭도 멈추는데 운전사는 핸드폰 통화 중

 

4. 바람 때문에 가제 힘든데 운전사까지 그러네 혼자 중얼거리며 진행한다.

 

5. 갑자기 그 트럭이 빵빵거리며 뒤쫒아와 앞을 가로 막으며 선다.

 

왠일이래 ???

 

"아저씨 나 한테 욕했죠"

 

이런 더러운 경우가 있나 ?   이런 때에는 좀 비겁해지기로 한다.  

 

"아니 욕 안했는데요"

"욕 했잖아요"

 

정색을 하며 다시 한번 단도리한다.

"욕 안했습니다.   그러니 흥분하지 말고 갈 길 가세요.   그렇게 흥분해서 어떻게 운전을 하겠습니까 ?"

 

한참을 멍하니 쳐다본다.   나는 다시 내 길을 가고.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이 친구는 꽤 성질도 급한 듯 하다.   그렇게 흥분하면서 살면 앞 길이 별로 좋질 않을텐데 걱정이 된다.   나도 사실 꽤 성질이 나지만 조금만 비겁하면 세상이 즐겁다는 전유성 말대로 그렇게 했다.   그것이 오래 사는 비결이란다.

 

사실 그것은 겉모습이고 속감정으로는

 

"이 ㅅ ㄲ 가 나를 뭘로 보고.   나이도 어린 것이 건방지게"

 

하지만 그래봐야 최악의 경우 犬死, 최선의 경우 犬망신 밖에 더 당하겠는가 ?

 

 

 

길가에는 최고 최대의 쌀 생산지답게 퇴색한 쌀창고도 있고 대형 도정 공장도 있었다.  

 

한 도정 공장 앞을 지나는데 개 한마리가 쫒아 나오며 난리를 떤다.  

 

잘한다.   이번에는 개새끼까지.

 

그러나 저러나 왜 개들은 자전차만 보면 그 난리를 떠든가 ?   옛날 개 조상이 자전차에 치어 죽은 적이 있나 ?

 

광활면 삼거리쯤 올 때까지는 바람에 날아 갈 것 같다.   삼거리에서 방향이 조금 바뀌니 조금 살 것 같고.   그나저나 광활면은 이름 그대로 광활하다.

 

집에 돌아 와 찾은 자료에 의하면 광활면 일대의 너른 들녘도 1923년 일본인 재벌 아부가 자기자본 100만 엔과 정부보조금 100만엔 등 200만 엔으로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창설하고 방조제를 쌓아 만든 대 농장이란다. 

 

 

 

죽산면 소재지에 들어오니 옛날에는 그래도 꽤 번창했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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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하시모토 농장.  

 

 

조정래 소설 아리랑에는 한 일본인이 다른 일본인들보다 한 발 늦어 교통이 좋은 옥구군(군산) 근처의 논을 차지하지 못하고 이곳 죽산까지 오게 되었다는 귀절이 나온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일본놈, 아니 왜놈이 있었었는데.

 

바로 그 일본인이 하시모토이었던가 ?   그런데 그 작자라면 이렇게 아직도 이름이 전해질리는 없을텐데 궁금한 일이다.

 

농장 안내판 바로 전에는 사립인 김제서고등학교가 면단위로는 어울리지 않게 있어서 그것에 정신 팔려 안내판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못했었다.

 

집에 돌아와 지식IN에 '죽산면 하시모토 농장'하고 물어보니

 

대하소설 아리랑도 바로 그러한 모티브에서 출발했다.
소설 아리랑은 한일합방 직전의 김제 만경평야에서 시작해 일제 강점기의 군산항구, 하와이, 일본, 만주 연해주, 중국,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들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의 근대사 현장을 두루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김제시 죽산면 내촌면 소설 아리랑의 발원지로 꼽힌다.
작가는 죽산면 내촌면 일대의 다양한 인물군상을 통해 한일합방 전후에서 해방 전까지 김제 만경평야 일대에서 벌어졌던 일제의 수탈과 강제징용, 소작쟁의, 독립운동 등 우리 근세사와 민초들의 애환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김제시 죽산면 내촌면. 김제에서 부안 쪽으로 10여분 포장된 길을 달리다가 죽산면 신흥마을에서 좌회전하면 조그만 야산 아래 모습을 보인다.
소설 아리랑의 주요 등장인물인 지식인 송수익을 비롯 지삼출 감골댁네 손판석 박건식 등이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지역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인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도 바로 죽산면에 있었다. 죽산면에는 하시모토가 사용했던 사무실이 아직도 남아있고, 김제땅 여러 곳에 그의 공적비가 남아 부끄러운 과거를 되새겨주고 있다.
일제시대 전라북도내 일본인 대농장은 동양척식주식회사 교본 하시모토농장 웅본, 아부, 다목, 석천, 승부, 정목농장 등 9개였다. 그중 하시모토는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의 개간지를 중심으로 농장을 이루었다.
소설 속에서 하시모토는 노일전쟁시 통역관을 지냈던 인물로 노일전쟁이 승리로 끝나며 20대 후반에 사업가로 변신, 일본세를 등에 업고 김제에 들어와 대농장주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마구잡이로 논을 사들여 대지주로 자리잡는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ejw0255

글   출처 <http://www.madang21.or.kr>

 

이런 이런 그 소설 읽은지가 오래 되어서 그 내용을 생각해 내질 못했다.   그 하시모토 사무실을 방문했어야 했는데... 이런 이런 !!!!

 

어쨌든 이것은 나중에 집에 돌아와 안 일이고 쇠락한 시가지가 왠지 정겨워 사진 한 장 찍고는 국도 23번에서 다시 지방도 711을 타고 간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죽산 뒤의 야산이 그리도 정겹더니 뭔가 그 소설 아리랑에서 남은 기억이 머리 속 한 구석에 있었던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내가 그쪽이었다.   보물을 바로 옆에 두고 그 가치를 모르는 바보라니.

 

 

다시 바람과의 싸움을 계속하는데 벽골제 안내판이 보인다.   이 근처였던가 ?   지도로 확인하니 바람부는 방향으로 가면 국도 29번이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벽골제가 나온다.   그러나 자전차 여행은 역시 제한이 있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다음으로 미룬다.   또 올 기회가 있겠지.  

그 때에는 자동차로 와서 이 억울함을 갚자.

 

국도 30번을 만나서 일단 좌회전하니 바람과는 순방향이다.   그래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은 바람을 타고 보자.   신태인쪽으로 향한다.   바로 안내판이 나온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정읍시이다.

 

와 !!!  바람의 위력을 실감한다.   약간 경사져 올라가는 길을 나는 듯이 달린다.   조금만 더 비벼대면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다.   

 

 

길가 안내판에는 신태인보다는 태인으로 나온다.   옛날 태인이라는 고을이 있었는데 일본 아저씨들이 철도를 내려고 하자 이곳에 사는 유림들이 극력 반대를 한다.

 

"어딜 감히 이곳에 그런 것을 만들어."

 

그래서 할 수 없이 옆으로 기차역을 만들어 이름을 신태인이라 하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아닌가 ?

 

이곳 신태인도 이런 전설을 가진 동네인 듯하다.   태인에는 옛날 한가닥했던 건축물들이 있다고 안내판에 나오는 것을 보니.  

 

신태인에 들어서면서 나오는 지방도 710을 타고 가면 만석보 유적비에 전봉준 고택들이 있어 그 길을 타고 가는데 바람이 너무 방해를 한다.   아무래도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할 것 같아 일단 뒤돌아 와 신태인역으로 향한다.

 

<역앞 광장>

 

 

역에 도착한 시간이 2시 15분      생각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을 했다.   이곳에서 정읍은 얼마 안되는 거리인데 정읍에서 기차시간이 7시 35분이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하기로 한다.

 

역앞 의자에 앉아 있으니 왠 정신을 놓아버린 청년이 오더니 뭔 말인가를 시작한다.

 

횡성수설하는데 요점은 400원만 달라는 이야기이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니 800원 정도.  500원을 주니 100원 짜리 하나를 더 달란다.   600원을 주니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하세요"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뭐하는 것인지. 이렇게 가르치면 나중에 나이든 사람을 보면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할까 ?

 

 

 

쉬는 김에 아주 푹 쉰다.   3시까지 과자도 사먹고 물도 사서 보충을 하고 놀다가 다시 출발을 한다.   정읍에 도착해서 찜질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지방도 710은 철길과 거의 나란히 나있어서 돌아올 때 이 길이 생각날 듯 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정우면사무소에서 좀 쉰다.   신태인에서 정읍까지 16 Km인데 바람탓에 너무 어렵다.   길은 거의 명품 완전 평면은 아니지만 내달리기 너무 좋은 수준인데.

 

 

 

정우면사무소 앞에는 기념비, 송덕비가 죽 서있었다.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고부군수 조병갑이도 송덕비가 있으려나 ? 

 

뭘 그리 잘 했다고 송덕비를 세워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날 탐관오리들의 수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을까 ?

 

 

쌀로 인한 숫한 고통과 시련은 오늘까지 전해내려오는지 길가 걸게의 외침이 왠지 서글프다.

 

호남고속도로 위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 정읍에 가까워 가는데 여기도 대나무숲들이 누런 색이다.   원래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아 대쪽 선비를 상징했었는데 그런 선비가 없으니 대나무가 누래졌는가 ?   오다보니 여기저기 대나무들이 많이 죽어 있었다.   그 이유가 뭔가 ?

 

마침 길 건너에 한 사람이 오고 있었다.

 

"여기 사세요 ?"

"아니요"

"왜 대나무가 저렇게 죽었지요"

"모르겠는데요"

"................."

 

나만 궁금한가 보다. ^^;;

 

 

멀리 건물들이 보여 가보니 공단이다.   그래도 이곳 정읍은 공단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니 지차체가 자랑하는 공장 유치가 어디 정도 성과가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 중에 카길도 있었다.

 

카길이 누군가 ?   그 유명한 곡물 메이져아니던가 ?   아니 그 카길이 왜 여기 있지 ?

 

왜 이곳에 있겠니 ?   돈 벌라고 있겠지.   쌀 수입 절대 반대를 외치는 농민들과 그 맥을 이어준 동학혁명의 반외세의 외침, 그리고 당당한 듯 서있는 카길.

 

역시 세월은 흘렀다.

 

 

새로 개발된 주택지를 지나니 그 전에 와 본적이 있는 고속도로 나가는 사거리와 그 옆의 정읍역.

 

정읍역앞 광장은 공사중이었다.      그 덕분인지 역앞은 불법 주차 차량으로 상당히 어수선하다.

 

드디어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4시구만.   16 Km오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어쨌든 오늘 이어달리기 목표 정읍에는 무사히 도착했고 다음은 정읍부터 시작이다.

 

언제 다시 시작할꼬...

 

 

 

(뒷이야기)

 

오늘 이동거리는 74.11Km였다.   생각보다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바람 때문에 체감 거리는 100 km이상인듯.

 

찜질방을 찾느냐 시내 구경을 했는데 찜질방을 못 찾고 대신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잔차 관리가 되는 식당을 찾아 다시 백반을 먹고 역시 가격은 4,000원.   역시 음식은 전라도다.

 

오늘의 격언

 

1. 봄날에는 남쪽 방향으로 향하지 말 것.   바람이 왠수가 된다.

 

2. 전라도에서는 음식가지고 고민하지 말 것.

 

3. 역시 조금만 비겁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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