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땅끝마을까지 輪行記

정읍에서 목포까지

정안군 2006. 5. 15. 13:46

 

마침 토, 일, 월 3일 연휴가 이어져 이번에 밀린 숙제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일단, 첫날 아침 기차로 정읍까지 간 다음 정읍에서 무안이나 목포까지 이동하고 다음 날은 해남 땅끝까지 가고 버스편으로 해남이나 강진까지 가서 그곳에서 숙박하고 마지막 날 여유있게 돌아오는 것으로 일단 계획을 잡는다.

 

자 !!! 출발

 

해가 길어져 아침 6시 경이라도 대낮처럼 밝다.   기차를 타고 달리는 들판은 벌써 여름인듯.

 

다시 이어달리기를 시작할 정읍역 광장은 저번보다 더 번잡하다.   얼마나 잘 만들려고 이렇듯 오랜 시간동안 불편을 주는 줄 모르겠다.

 

기차가 예정보다 조금 연착해서 역 구내에서 조립한 다음 역 앞 광장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11시 4분이다.  

 

자전차 바퀴를 세미 슬릭으로 바꾸었더니 역시 자전거 속도가 달라졌다.   싱싱 잘도 나간다.   다행히 바람도 거의 없고.

 

역앞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달리니 바로 국도 1번과 연결된다.   철도 육교를 올라 섰다가 내려가다가 물통 하나를 떨어뜨린다.    다시 돌아가기는 그렇고 해서 그냥 달린다.   가다 하나 사지 뭐 !!! -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글쎄 잘 안 됐다.

 

 

고속도로 굴다리를 빠져 나오니 지방도 708이다.   이 도로를 타고 가면 고창에 이르게 되는데 작은 고개들이 이어진다.

올망 졸망한 고개길을 달리니 국도23번과 만난다.   이어지는 4차선 도로는 바로 고창입구로 이어지는데 입구에는 고창을 알리는 돌이 서있다.

오른쪽으로는 우회 도로이고 좌측 길이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고창 읍성과 시내 구경을 하려고 작은 고개 넘어 고창읍내로 향한다.   고개를 넘으니 고창여고, 고창고등학교, 그리고 고창군청 더 가니 고창읍성이다.

 

입장료는 1,000원 그러나 자전차가 짐이 된다.   한참을 망설이다 성안 구경은 다음으로 미룬다.

 

고창읍성 []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1,684m. 모양성()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백제 때 모량부리였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계유년()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단종 원년(1453) 계유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며, 숙종 때 이항()이 주민의 도움으로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도 있어 확실하지 않다. 반등산()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북의 3문과 치() 6곳,
수구문() 2곳, 옹성()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육축()에 홍예문()을 열고 초루(譙)를 세우는 방식과 달라,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북문은 2층처럼 생긴 다락집이고, 아래층 어간()에 문짝 둔테구멍이 있다.

 

서문터는 1976년 발굴되어 기둥초석과 문짝 달던 위치가 확인되고, 동문터도 기둥초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문 구성은 다른 유구()에서 아직 조사된 바 없어 성벽과 문루()와의 접합에 대하여 밝히지 못하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자연석은 거칠게 다듬어 썼는데, 초석·당간지주(竿) 등을 깨뜨려 쓴 것도 있다. 고창의 성벽 밟는 놀이는 성가퀴 뒤의 성로()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은 옹성(공격을 쉽게 받지 않도록 항아리를 반쯤 쪼갠 것 같은 구조의 성문 가림 부분)으로 보호받게 해 놓아 들어가서 보면 꽤 흥미가 있겠다.

 

그러나 오늘은 일단 패스

 

그 앞은 신재효 고가

 

여기도 사진만 한 장 찍고 패스.

 

그 옆은 판소리 박물관.   여기도 자전차 보관 문제로 패스.

 

 

다 패스하면 뭘 보나 ???? 

 

그 생각도 이번에는 패스...

시간이 12시 30분 경... 일단 고창을 벗어나 기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고창 장터를 지나 영광도로로 다시 나선다.

 

오늘은 마침 고창 장날인듯 꽤 분주하다.

 

장날 구경도 하고 싶지만 시간 관계로 이것도 패스.

 

고창은 죄다 패스다 ^^

 

 

국도변에 식당이나 슈퍼 비슷한 것이 있겠지 하고 달려도 아무 것도 없다.   물도 다 떨어진지 오래 되어 목이 타는 듯한데.

 

간신히 영광 경계에 이르러 동네 구멍가게에서 포칼리 스웨트 하나를 사서 먹는다.   오랜 가뭄에 물들어가듯 한 캔을 마신다.

 

 

 

드디어 영광 입구다.   여기부터는 전라남도... 영광 거의 다가 가서야 길가에 허름한 기사 식당이 있어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벌써 2시 경

 

목마르기 전에 마시고 허기지기 전에 먹어야 되는 자전차 여행 수칙이 이번에는 시작부터 잘 안된다.

 

백반은 전라도 공통 4,000원인데 같은 공통점으로 반찬도 참 많기도 하다.   영광 입구라고 굴비 한마리도 있다.

 

 

처음오는 영광이지만 도시 자체는 별 특징이 없다.   이곳도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서 도시 경관은 영 꽝이다.

 

그나마 서운하지 않게 지나가게 해 준 콘테이너 막사가 참 고마운 도시였다.

 

영광읍과 불갑사로 유명한 불갑면과의 경계는 고갯길이다.   힘들게 올라섰다가 내려 서면서 얼핏 보니 고개 정상에 고개 이름과 해발이 표시되어 있었다.

 

순용재, 해발 57 m(지도에는 연두개재로 되어 있는 듯 한데...  정확한 이름은 글쎄요... 죄송....)

 

정말 대단한 고개다.   워낙 낮은 지형이다 보니 해발 57 m짜리가 대접을 받는다.

 

 

 

불갑사 입구 삼거리에 이르니 선돌 지명답게 선돌이 우뚝 서있고 들판에는 핑크빛 꽃들이 피어 있었다.   오랜 기억속의 자운영이다.

 

우리 어렸을 때 온통 이 무렵 논을 장식하던 그 자운영이 들판 가득 피어 있다.   보리와 자운영, 이 둘은 우리 어린 시절 봄을 대표하던 놈들이었는데 요즘은 보기도 어려워졌다.  

 

 

 

자운영 []

 

연화초()·홍화채()·쇄미제()·야화생이라고도 한다. 중국 원산으로 논·밭·풀밭 등에서 자란다. 밑에서 가지가 많이 갈라져 옆으로 자라다가 곧게 서서 높이 10∼25cm가 된다. 줄기는 사각형이다.

잎은 1회깃꼴겹잎이고
작은잎은 9∼11개이며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 또는 타원형이고 끝이 둥글거나 파진다. 잎자루는 길며 턱잎은 달걀 모양이고 끝이 뾰족하다.

꽃은 4∼5월에 피고 길이 10∼20cm의 꽃줄기 끝에 7∼10개가 산형()으로 달리며 홍색빛을 띤 자주색이다.
꽃받침은 흰색 털이 드문드문 있으며 5개의 톱니가 있고 수술은 10개 중 9개가 서로 달라붙으며 씨방은 가늘며 길다.

열매는 협과로 꼭지가 짧고 긴 타원형이며 6월에 익는다. 꼬투리는 검게 익고 길이 2∼2.5cm로서 2실이다. 꼬투리 속에 종자가 2∼5개 들어 있고 납작하며 노란색이다.

어린 순을 나물로 하며, 풀 전체를 해열·해독·종기·이뇨에 약용한다. 뿌리에
뿌리혹박테리아가 붙어서 공중질소를 고정시키며 꽃은 중요한 밀원식물이다. 남쪽에서 녹비로 재배한다.

 

 

불갑면을 지나 함평군 초입에 이르는 길은 또 고개다.

 

 

함평은 나비 축제를 막 끝낸 무렵이라서 아직도 그 여운이 여기 저기에 남아 있었다.   꽃잔디로 장식한 모습이 아름다웠고 벌레와 나비가 그 주인공였던 축제답다.

도로는 4차선이었다가 2차선이로 이어지지만 크게 차량 통행량이 많질 않아 달리기는 힘들지 않았고.

 

함평읍내까지는 제법 힘든 고개를 넘어야 했다.   내 머리 속 함평은 오원춘 함평 고구마 사건으로 남아 있을 뿐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도시이다.

 

아 !!! 그리고 보니 해방 이후 올림픽 첫 금메달의 주인공 김원기가 이곳 함평 출신이다.  

 

 

함평 고구마 사건

 

1978년 4월24일, 광주시 시외버스터미널 앞 북동성당. 가두진출을 시도한 농민시위대가 경찰에 막혔다. 농민들의 단식 9일째인 5일, 당국이 손을 들었다. 보상금이 지급되고 연행자가 풀려났다. 2년 반을 끌어온 함평 고구마 사건의 종결이다. 관의 횡포에 맞선 농민이 거둔 최초의 승리인 이 사건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겼다.

 

발단은 76년 9월 농협의 고구마 수매 정책. 얇게 썰어 말린 건고구마 대신 생고구마를 사들이겠다는 방침에 농민들은 기쁨에 들떴다. 가마당 300~400원씩 이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좋을 수밖에.

전량 수매를 약속한 농협이 실제로 사간 물량은 생산량의 40%. ‘걱정 말라’는 농협을 믿었던 농민들은 시장에 내다 팔 기회도 잃었다. 전체 손해액은 1억4,000만여원으로 추산됐지만 신고액은 160개 농가의 309만원. ‘피해 신고자는 빨갱이’라는 정보기관의 협박이 먹혀 들었다. 당국의 은폐와 재갈 물린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도 전국적인 이슈로 부각되고 마침내 피해를 보상받게 된 것은 카톨릭농민회의 조직력 덕분이었다.

피해보상 이후 농협이 주정업자와 결탁해 80억원을 유용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언론에 ‘단군 이래 최대 부정’이란 타이틀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이듬해 터진 ‘경북 안동 감자 사건’(썩은 감자 씨앗을 불하한 사건ㆍ농민 지도자 오원춘씨 납치 감금, 테러로 표면화), YH여공 사건과 함께 유신독재 반대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부패구조가 얕잡아봤던 농민층에 의해 절대권력이 붕괴되는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함평을 지나면서 보니 날아 다니는 나비는 없고 버스 터미널에 나비 그림만 있었다.

 

여기서 어느쪽으로 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동강으로 해서 영암쪽으로 갈 것인지.   아님 무안으로 해서 목포쪽으로 갈 것인지.  

 

일단 멀지않은 곳에 있는 교차점 학교까지 가서 방향을 결정한다.   동강쪽은 2차선 도로라서 자전차 여행에는 적합할 것 같지만 영암까지는 멀어 보인다.

 

여기서 23번 국도를 벗어나 1번 국도로 무안을 거쳐 목포까지 가기로 한다.   4차선 포장이 되었고 갓길도 넓어 안전해 보이지만 역시 4차선 도로는 재미가 없다.

 

무안에서 포칼리로 갈증을 풀고 목포까지 가는데 이미 주행거리 100 km를 넘겨 몸뚱이 한계점에 온 듯하다.

 

무안을 좀 지나서 있던 백제고등학교가 반가웠다.   백제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백제중학교를 알고 있지만 백제고등학교는 처음이다. 

 

여기도 옛날 백제땅이긴 했나보다. ^^

 

무안 삼향면은 고개길 동네였다.   그야말로 고개 넘어 또 고개 아득한 ** 

 

마지막 진을 다 빼버릴려고 작심한 듯... 목포도 역시 쉽지 않은 도시였다.

 

 

무척이나 힘들었던 지산재 정상을 지나 드디어 목포...

자전차 도로를 따라 영산강 하구둑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오니 마침 이곳이 신시가지인듯 모텔들과 찜질방이 있었다.   일단 찜질방을 가서 보니 자전차 보관이 힘들겠다.   또 한 곳을 찾아가니 그곳도 그렇고.   이것 저것 생각하다가 자전차와 몸 건강을 위해 돈을 희생하기로 한다.

 

삼만원짜리 모텔에 들어가 자전차를 잘 보관한 다음 긴 오늘 하루를 접는다.

 

주행거리 125 km, 주행시간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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