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땅끝마을까지 輪行記

목포에서 해남 땅끝까지

정안군 2006. 5. 16. 20:25

남 동네를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밤이 일찍 찾아오고 또 그 밤이 무척 길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저녁을 먹고 이승엽 야구 경기나 보려고 했더니 그 중계 방송은 나오질 않았다.    할 일도 없어서 일찍 잠자려고 해도 잠자리가 바뀐데다 침대라서 영 깊은 잠을 이루질 못했다.

 

여기서 해남 땅끝까지 한 80 km 정도로 보면 4시간 잡고 아침 7시쯤 출발하면 11시쯤 땅끝까지 도착할 수 있을테고 거기서 히치나 버스편으로 광주 직행이 있는 강진이나 해남으로 이동하면 광주에서 충주가는 버스 막차가 5시 30분이니 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외딴 곳에서 또 하루밤을 지내는 것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아침 일찍 나서기로 한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시계를 보니 5시가 좀 넘어 있었다.   벌써 밖은 환하다.   그래 출발하자.

 

영산강 하구둑을 지나는데 멀리 동쪽에서 해가 떠오른다.   옅은 바다 안개가 끼어 있고 완전히 밝은 상태가 아니라서 하구둑가를 따라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벌써 아침 산책나온 사람도 있었다.   아침 바다 바람을 맞으며 운동하면 어떤 기분일까 ?

 

 

하구둑을 다 건너자 땅끝 방향은 우회전하는 길이다.   대불공단을 지나 영암 방조제를 건넌 다음 산이면을 통과하는 지방도 806을 타기로 한다.

 

대불공단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은 듯 조금 을시년스러운 분위기에다가 길은 상당히 넓지만 포장 상태가 아주 좋질 않다.

 

핸드폰이 울려 꺼내 보니 아침 알람 시간이었다.   새벽 6시에 맞추어 놓은 것이 주인은 벌써 일어나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아침은 해남가는 중간에 식당이 있으면 먹으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영 꽝이다.   목포공항과 해군 부대를 지나서 영암 방조제를 건넌다.   진도 방향과의 갈림길.   그런데 여기서 이정표를 보니 여기서 해남까지 30 km이다.   벌써 17 km정도를 왔지만 중간에 식당이 있을 분위기도 아닌데 빈속에 너무 무리하는가 싶어진다.

 

할 수 없지.   어쨌든 진행하는 수 밖에.   낮은 구릉 지대라서 낮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시간이 가면서 해남에는 가까워 지지만 가까워 갈수록 힘도 빠져 간다.  

 

그런데 해남 6 km 정도를 남기고 도로는 해남읍내로 들어가는 길과 진도에서 강진으로 이어지는 4차선 국도 18번으로 갈리는데 안내판에 의하면 땅끝은 국도 방향이다.   해남에 들어가야 식당이 있을 것 같은데 고민을 하다가 그냥 국도를 탄다.   마치 고속도로같은 국도를 달리니 완도와 땅끝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나오니 당연히 해남 외곽.

 

와.. 잘못하면 오늘 극기 훈련을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식당 하나 없으려고 ..

 

완도로 이어지는 국도 13번을 따라 간다.   완도까지는 4차선 확장 공사중인가 보다.  

 

갓길도 좁고 힘이 빠져가니 집중이 안되어 좀 쉬기 위해 예비군 훈련장 앞에 시내버스 정류장에 들르는데 그 옆에 있는 한 표지석을 발견한다.

5.18 광주 민중항쟁은 벌써 26년 전의 옛날 이야기인듯 한데 그 흔적이 여기 남아 있다.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기억속에 희미한데 지금 우리에게 518은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가 ?

 

 

 

다행히 거기서 머지 않은 곳에 기사 식당이 있었다.   메뉴는 전라도의 기본 백반인데 값은 전라도 공통 4,000원이 아니고 5,000원이다.

 

아침 8시 30분이다.   벌써 세시간을 탔고 60여 km를 달린 셈이다.   무리를 한 탓에 몸에 조금씩 이상 신호가 오는 듯..

 

그래도 밥을 먹으면 좀 나아지겠지 희망을 갖는다.   식당을 떠나 조금 더 가니 시인 김남주 생가 안내판이 나온다.

 

김남주 [, 1946.10.16~1994.2.13]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봉학리에서 태어났다.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 2학년 때 획일적인 입시위주 교육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1969년 검정고시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뒤 3선 개헌 반대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 등과 전국 최초로 반()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하였으며,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하였다.

 

8개월 복역 후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창작과 비평》 1974년 여름호에 《잿더미》와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듬해 광주에서 사회과학 전문서점 카프카를 열었으나 경영난으로 1년만에 문을 닫고, 1977년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광주에서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활동하다 사상성 문제로 1978년 서울로 피신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하였다.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4년 수감중 첫 시집 《진혼가》가 출간되었다.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만에 석방되었으며, 이듬해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결혼하였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건강상의 문제로 사퇴하였고,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여 망월동의 5·18묘역에 안장되었다.

 

스스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라고 칭했듯이 그의 시는 강렬함과 전투적인 이미지들이 주조를 이룬다. 유장하면서도 강렬한 호흡으로 반외세와 분단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노동문제 등 현실의 모순을 질타하고 참다운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시집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사상의 거처》(1990),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 등과 시선집 《사랑의 무기》(1989), 《학살》(1990), 산문집 《시와 혁명》(1991),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 1978)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1991)과 단재문학상(1992), 윤상원문학상(1993), 민족예술상(1994)을 받았으며, 2000년 5월 광주 중외공원에 《노래》가 새겨진 시비()가 제막되었다.

 

 

지도에 의하면 이 정도쯤에서 완도가는 길과 땅끝가는 길이 갈라질 듯 한데 영 갈림길이 나오질 않고 장고개라는 고개가 이어진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다지 심하지 않은 이 고개를 넘으니 그제서야 완도와의 갈림길.   아무래도 지도가 잘못된 것같다(나중에 확인하니 그랬다)

 

 

윤두서 고택입구에서 좀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섰는데 왼쪽으로 눈에 익은 돌덩어리들이 있었다.

 

윤두서 [, 1668~1715]

 

본관 해남, 자 효언(), 호는 공재()이다. 선도()의 증손, 덕희()의 아버지이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시서생활로 일생을 보냈으며 죽은 뒤 가선대부·호조참판이 추증되었다. 그는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과 경제·지리·의학·음악 등에도 뛰어났었다 한다.

 

화가로서는 특히 인물화와 말을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한 일반 회화작품은 대체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한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인다. 그러나 인물화와 말 그림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하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현재 그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윤두서상》(국보 240)을 들 수 있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愹)에게 계승되고, 조선 후기의 화가 허유()도 종가에서 그 전통화풍을 익혔다 한다. 유작으로는 60여 점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481)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노승도()》 《출렵도()》 《백마도()》 《우마도권()》 《심산지록도(鹿)》 등이 전한다.

 

 

 

고인돌이었다.   안내판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안내판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이곳 해남 사람들은 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어서 그런 듯 싶지만 나같은 외지인을 위해서 안내판을 세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나중에 버스로 올 때 보니 그 근처 여러 곳에 고인돌이 보였다)

 

 

 

송지면을 넘어서면서 카운트 다운의 시작이었다.   10, 9, 8 km  부지런히 비벼댄다.   여러번 와 본 적이 있어서 눈익은 곳이다.   드디어 2 km 전방 송호해수욕장.   소나무 숲은 여전한데 큰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송지 버스 정류장에 써 있는 버스 시간표를 보니 해남과 광주나가는 버스가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있었다.   여기서 나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고.

 

드디어 마지막 급경사.   체력이 너무 소모된 탓에 그냥 자전차를 끌고 걸어서 올라가기로 한다.   오르고 오르니 고갯마루에는 왠 콘도들이 무지막지하게 서있다.  

 

여기도 정동진의 개발 흐름을 따르는 듯.

 

 

 

 

내리막을 내달린다.  

 

 

멀리 보이는 땅끝비..

 

 

 

와 !!! 다 이루었다.

 

 

앞은 바다 안개가 끼어 멋진 경관은 아니지만 새로 세운 땅끝비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다.

 

주행거리 100 km, 주행 시간 5시간...

 

 

 

땅끝 마을도 많이 바뀌었다.   산위의 전망대도 엄청난 크기로 바뀌었다.  

 

 

 

한시라도 빨리 광주에 가기 위해 11시 10분 버스로 해남을 거쳐 광주로 나가기로 한다.   차 트렁크에 자전차 핸들을 접어 넣으니 꼭 맞춤이다.   기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품이 덜 든다.  

 

이제 한 과정은 끝이 났다.   그러나 땅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듯.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땅끝에 섰다.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오리 햇빛

애린

나.

 

 

- 김지하, 그 소, 애린 50

'충주에서 땅끝마을까지 輪行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읍에서 목포까지  (0) 2006.05.15
함열에서 정읍까지 - 뒤  (0) 2006.03.26
함열에서 정읍까지 - 앞  (0) 2006.03.26
부여에서 함열까지  (0) 2005.05.30
조치원에서 부여까지  (0) 2005.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