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연수기

수료식과 강제 수용소 그리고 독일과 이별

정안군 2006. 8. 7. 12:28
 드디어 수료식이다.   수료식 장소를 찾아가는데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아서 따라가기가 바빴는데 그 와중에 최 선생을 놓치고 많다.   잠깐 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하고 자리를 떴는데 그 사이 일행은 이동을 하고 좀 기다리라고 했는데 처음에 오리엔테이션 한 장소니까 나중에 같이 오라고 한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디인 줄을 알아야지.   이거야 원.


할 수 없이 장소를 알아 놓으려고 나도 쫄랑쫄랑 따라갈 수밖에 없었는데 미로 속을 누비면서 가서 도저히 다시 그 장소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그냥 수료식을 참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바람에 수료식장에 올 수 없었던 최 선생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혼나도 싸지 뭐.


수료식장에는 우리 담당 주임교수인 코털교수(콧수염이 있어서 우리가 부른 이름), Strum 교수와 Sell 교수가 참석했다.


수료증명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서 앞에 가가면 주임교수가 주었는데 나는 단장 다음 순서였다.


사람들에게는 내가 실질적인 수석 졸업(^^)이라고 떠들어 댔는데.   통역 전 선생이 거들기를 어떤 자기들만의 점수 순서에 의해서 순서를 정했을 거란다.


점수도 나오지 않은 수료증을 가지고 요란 떨 것까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소리를 들으니 속으로는 흐뭇 ^^


그러나 최 선생에게 혼나면서 그런 기분도 잠시.


순서를 마치고 자유 발언 시간이 있었는데 단장이 그동안 우리를 위해서 수고해 주어서 고맙다고 먼저 인사.


그 다음 몇 몇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고 아첨성 인사.


나야 원래 그런 아첨성 발언을 신물을 내는 사람이라서 인사 치례 말 몇 마디하고 나서 미리 우리 연수 일정을 알려 주었었더라면 그 쪽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준비해 가지고 왔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쉽다고 했더니 갑자기 앞에 앉아있던 교수들은 당황 모드로 간다.


코털 교수가 나서더니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고 사과한단다.


마치니 단장도 나에게 잘했다고 하고 전 선생도 고맙단다.   뭐가 고맙냐고 했더니 그런 식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지 않으면 우리를 너무 물로 본 댄다.


물로 보면 안 되지.


끝나고 간단한 뒤풀이.   코털교수가 맥주 한 병씩 산단다.   전 선생은 정말 유례없는 일이란다.   이것이 문화 타협인가 ^^   맥주라 해야 조그만 사이다 병 같은 것이지만 유례없는 일이라니 더욱 맛있다.   역시 술중에서도 제일 맛있는 술은 공술이라고 했잖아.   내 것은 아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최 선생을 주었다.


독일 마무리로 베를린 북쪽 작센하우젠이 있다는 2차대전 중 사용되었던 집단 수용소를 방문하도록 한다.


이 지역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통 정기권 범위를 넘는 시골 지역이라서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비테나우에서 S-반을 타고 오라리엔부르크까지 한참을 간다.   역에서 내려서 한적한 시골 정취가 마을을 걷고 걸어서 수용소까지.


자기들 역사에서 남에게 보이기 힘든 수치의 역사이지만 그대로 보존하면서 다시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은 유태인들이 수용된 곳이 아니고 주로 정치범들이라서 그 무시무시한 가스실이나 시체 소각장 같은 것은 업었고 이전하고 버려진 공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는 수용실에는 그 방에 있었던 사람들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독일어로만 쓰여 있어서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자유를 빼앗긴 채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던 사람들은 이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세월을 보냈을까?


한 방 앞에는 지긋이 나이든 아저씨 한 분이 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었다.   그 부인에게 물어보더니 그 안에 수용되어 있었던 분은 아저씨의 아버지란다.   이곳 옥중에서 사망했다고.


이곳의 역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진행형이었다.


백인들의 대량 살육은 유태인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살육 역사는 사실 이것만으로 그치진 않는다.


히틀러는 유태인뿐만 아니라 집시들과 공산주의자 또는 동성연애자도 대량 살육을 했는데 이 가운데 집시들은 지금도 세력을 형성하지 못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 파악도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대략 40에서 100만 정도의 집시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밖에.


하긴 그것뿐이랴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 대한 수탈로 인해 천만 명 정도의 아사자가 나왔고, 중국에 대한 아편 강매로 중독 사망한 사람들 수가 천만 명 정도였다.    여기에다 그들의 사촌격인 미국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 천만 명,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인들을 학살한 그 수도 대략 천만 명.


현대사에서 백인의 역사는 정말 피의 역사이다.


아직도 이를 대물림한 이스라엘에 의한 대량 살육.


보는 시간이 늘어져 혼자 먼저 나왔다.   아직도 미진한 정리를 위해서.   돌아올 때도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하지만 생략했다.   괜히 가슴이 떨리더군.   역시 죄 짓고는 못 산다.


느려터진 S반을 타고 일장 포츠담 광장으로 거기에서 이집트 박물관을 간다.   이곳의 백미는 네페르티티 왕비 상, 눈 한쪽이 정상이 아니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네페르티티

이집트 제18왕조의 왕 아크나톤의 왕비. 국적 : 고대 이집트
활동분야 : 제18왕조의 왕 아크나톤의 왕비

 

이집트의 귀족 출신으로 추측되는데, 왕과 똑같이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숭배하고 아톤 신앙을 찬미하여 이에 귀의하였다. ‘미녀는 오다’라는 뜻의 이름대로 1914년에 페루 텔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석회석 채색 흉상(베를린 달렘 미술관 소장) 및 미완성의 두상(이집트박물관 소장) 등이 그 미모를 실증하고 있다. BC 1367년 왕의 총애를 잃고 왕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출처 : '이집트의 미인(네페르티티,클레오파트라,아낙수나문)에 대해..' - 네이버 지식iN)

 

 

어떤 경로로 이것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집트도 독립을 했고 이제 그들도 문화재 관리 능력도 있으니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입구를 못 찾아 주위를 뱅뱅 돌다가 TV 송신탑에 오른다.   엘리베이터는 일제 SONY, 소니가 엘리베이터도 만들었든가?


송신탑 라운지에 앉아 어둠이 깔리는 베를린을 발밑에 두고 베를린의 기억을 정리한다.


숲, 강, 호수 그리고 지겨웠던 맥주.   다시 베를린에 올 기회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다시 온다면 이 TV 타워에 올라 보겠지?    숙소로 돌아온다.   오늘은 전체 회식을 한다고.


이제 우리 단원도 헤어질 시간이 멀지 않았다.   미운 정 고운 정 많이 들었었는데.


비가 내린다.   이제 베를린은 짧은 여름은 끝이고 긴 우기에 들어간다고.


안녕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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