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는 가고 껍데기만 남아.
아기자기하고 검소한 생활공간에서 살던 혁명 지도부를 품었고, 고곳에서 그들이 지녔던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애썼던 조원 혁명 구지에서 박제화된 듯한 연안 혁명기념관으로 이제 시선을 옮깁니다.
진형행의 혁명 공간이었던 조원에 비해 이곳은 성공한 혁명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공간이어서 그런지 모든 게 엄청나게 큽니다.
건물도 크고, 그 앞에 서있는 모택동 동상도 크고.
5시에 폐관할지도 몰라서 그 안에 오려고 서둘렀는데, 폐관 시간은 한참 더 남았습니다만 이제는 다리가 아파서 넓은 공간 순회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너무 커서 정이 안 가더군요.
장정 시절 사실 말이 좋아 장정(長征 긴 행진)이지 도바리 신세가 되어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거 아닌가요?
그래도 중간 모택동이 일본과 싸우러 북으로 간다는 의제를 설정해주어서 뭔가 사기도 오르고 목표가 생긴 대열이 되었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한계 상황에 처한 이들이었잖아요.
그 와중에 사진을 찍는다든지 훗날을 위해 기록을 남긴다든지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은 할 수 없을 때이니 사실 장정 이 시기에 제대로 된 자료는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장정 관련 시설을 방문해 보면 그 자료가 그 자료고 그 사진이 그 사진입니다.
처음에는 책에서나 보던 지도나 그림이 보이니 재미도 있고 신기하지만 계속 찾아다니다 보면 많이 지루해집니다.
여기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으니 그다지 흥미가 없더군요.
아무튼 먼 산을 바라보면서 폼을 한껏 잡고 있는 모택동 동상을 지나서 건물 입구로 향합니다.
그 거리도 제법 되어서 땡볕에 가로 질러 가는 것도 힘듭니다.
나무라도 심어 놓던지.
건물 앞에는 당시 홍군 군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단체 사진을 찍으려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있네요.
건물 안에 들어서니 어디서 본 듯한, 아마도 귀주성 려평(黎平))에서 본 듯한 지도부 단체 기념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1935년에서 1948년 연안 생활을 나타내는 듯 하지요?
배경으로 쓰인 것은 그 당시 연안의 모습인 듯 하네요.
배경색을 황토 고원의 황토색으로 하니 훨씬 실감이 나는군요.
그런데 오른쪽 끝 서양인 부부의 상이 눈에 들어 옵니다.
누굴까요?
혹시 '중국 인민의 벗' 애드거 스노와 님 웨일즈는 아닐는지.
다른 곳과 다르게 여기는 초창기 섬서성 북부(섬북)에서 홍군을 이끈 지도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이들이 장정을 끝내게 되는 이 섬북에는 류지단과 습중훈이 이끄는 홍군이 이미 세력을 펼치면서 자리를 잡고 있어서 모택동이 이끌고 온 장정 팀이 쉽게 여기에 뿌리를 내릴 수가 있었지요.
이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모택동이 이끄는 홍군은 어디선가 괴멸되었거니 더 큰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을 겁니다.
처음 이 지역 초기 지도자 이자주(李自洲)의 모습이 보입니다.
도시 이름 수덕의 자리를 차지하고 수덕의 이름은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한 사람이지요.
다음은 군사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이 지역에서 많이 듣게 되는 이름들, 류지단과 사자장입니다.
모두들 자기 출생지 도시 이름을 바꾼 주인공들이지요.
그리고 이 지역 수반이었던 습중훈(习仲勋)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습중훈은 그냥 지날 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입니다.
여기서 한 커뮤니티 토론방에 나온 습중훈의 평을 들어 보지요.
중국의 개혁 개방을 대표하는 사람을 들라하면 모두들 등소평을 당연한 선두자로 생각한다.
허나 사실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선구자는 습진평(习近平 시진핑) 주석의 부친 습중훈(习仲勋)이다.
홍군이 국민당 에게 패배하여 중앙 소비에트 근거지를 떠나서 북상을 시작할 때 이들은 정확한 목적지가 없었다.
장정 도중에 노획한 신문에서 섬북(陝北)에 공산당 근거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곳으로 향한 것이다.
섬서 감숙 영하를 망라하는 섬감녕(陝甘寧) 변구 근거지로 인하여 공산당과 모택동이 새로 이곳에 발을 붙일 수 있었고 발전 할 수 있었다.
모택동과 공산당을 구한 이 근거지의 창설자이자 영도자가 습중훈이다.
당시 23세의 젊은이라 모택동이 첫 대면에서 크게 놀랐다고 한다.
국공내전시기 팽덕회 부대의 정위였고, 정권 수립 후에는 부총리로서 그리고 주은래의 조수로 십여 년 공작을 하던 습증훈은 모택동에 대한 개인 우상화가 심화될 때 1962년 당에서 축출되어 16년간을 감금생활을 하였다.
(섬감녕 근거지가 모택동과 중앙홍군을 살렸다는 소위 류지단 사건 문제)
모택동이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습중훈은 풀려나 광동성 성장이 되였다.
그는 거기 광동에서 많은 간부들이 해외 화교친척 문제로 축출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외와 중국대륙의 아주 큰 경제적 격차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광동인들이 홍콩으로 탈주하는 문제에 대하여 중시하게 되였다.
현재로 말하면 북한 주민들의 탈북 문제나 같은 성질이었다.
광동 경제의 발전과 변혁이 없으면, 이런 문제의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습증훈은 많은 간부들과의 토론을 거치며 홍콩의 인접지역에 수출 가공기업을 건설하여 광동 경제를 발전시키고 또한 이런《탈중자(脫中者)》들의 양산을 막아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등소평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게 되였다.
광동의 인문지연적인 우세를 가지고 광동이 먼저 한발 앞서 간다는 생각이었다.
이때 등소평은 ‘중앙에 돈이 없다’ 하자 습중훈은 ‘정책 승인만 해 달라’고 했다고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 심천특구인 것이다.
심천특구 설립 후 놀라운 발전과 경제 효과를 이룩하자 원래부터 ‘흑백 고양이’ 이론자인 등소평의 관심을 끌게 되어 전국적인 개혁 개방의 바람을 몰아오게 되었다.
물론 등소평의 지지가 없었다면 습중훈의 개혁개방 정책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구자임은 명백하다.
섬감녕 변구를 해방구로 만들어 중앙 홍군과 모택동을 기사회생 시켰다면, 심천 특별구의 창조로 중화 경제의 새로운 부흥의 길을 먼저 탐색하여 낸 사람이 습중훈 임은 분명하다.
이 글은 중국에 사는 동포가 쓴 것인데, 내가 좀 손을 보긴 했지만, 습중훈을 가장 잘 표현한 글 같더군요.
아무튼 이 습중훈의 아들이 습진평 즉 시진핑입니다.
등소평이 이끈 개혁 개방의 지도자 릴레이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그 개혁 개방 정책을 이끌어낸 습중훈의 아들이라는 것이 새삼스럽네요.
여기서 생각을 해 보면 동아시아 네 나라 국가 지도자들의 선조가 모두 일본과 관련 있는 것이 흥미 있습니다.
중국은 현재 말 그대로 항일 전사 습중훈의 아들 습진평이 지도자이고, 북한은 항일 지도자인 김일성을 할아버지로 하는 김정은.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일본 관동군 장교였던 박정희를 아버지로 둔 닭마담, 여기에 현 일본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 만주국 고위 관료를 외할아버지로 둔 아베.
편으로 나누면 중국과 북한이 한 편, 그리고 일본과 대한민국이 한 편처럼 보이는군요.
참 씁쓸하지요?
그건 그렇고 습진평이 팽려원(彭麗媛)과 재혼해서 1992년 외동딸인 습명택(習明澤)를 낳았답니다.
여기에 밑줄 쫙.
외동딸 습명택이 1992년생이면 올해 나이 만 22세.
‘별 그대’의 주인공 김수현을 능가하는 미모(?)의 한국 청년들은 관심을 갖고 도전해 보세요.
중국에선 만나기도 힘들겠지만 분명 미국이나 유럽 쪽으로 유학을 갈 테니, 그런 곳에서 마수(?)를 펼쳐보면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실없는 소리는 여기서 줄이고 전시물로 넘어갑니다.
그 외에는 병기류.
다른 기념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택동이나 주덕의 사진.
그리고 장정 후인지 장정 전인지 찍은 단체 사진.
위의 모택동 글씨가 현란하네요.
그리고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것은 그 당시 연안성의 모습이군요.
봉황산 아래로 펼쳐진 도시는 전형적인 중국 성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종루,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등등.
사실 우리나라 성시와도 비슷하지요.
또 여기가 다른 곳과 좀 다른 것이 침략군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류가 많이 전시 되어있네요.
하긴 이 동네 와서야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니 이 아래 지역은 이런 무기류가 있을리 없겠군요.
확실히 중국 홍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하기는 하지만 그 당시 미군의 장비에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층에도 전시실이 있는 것 같지만 현대 중국의 잘난 점(?)을 전시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 이상 구경은 생략합니다.
도무지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가 힘든 시간이었답니다.
그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이게 틀린 말이 아니라니깐.
연안 혁명기념관을 나와서 비싼 값을 하는 호텔로 가서 쉬고 싶지만, 바로 옆에 양가평(楊家坪)이라는 혁명 구지가 있으니 그냥 가기도 그래서 함 발걸음을 옮깁니다.
양가평이라는 곳도 있습니다.
여기도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였지만, 장소가 우선 협소하고 무엇보다도 그 당시 연안 성시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서 양가령이나 조원쪽으로 옮긴 것이 아닌 가 싶네요.
그 당시 가끔씩 벌어지는 장개석 군대의 공군에 의한 공습도 이들에게는 꽤나 공포였거든요.
이곳은 팔로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국공 합작 이후 홍군은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이 되어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되지요.
이곳도 모택동 거주지가 있더군요.
조원과 비슷한 규모의 아담한 주택입니다.
바로 옆에는 동굴 집도 있고 절벽 위에는 방공호도 있습니다.
조원에 비하면 작기도 하고 나무도 적어 삭막해서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점심 무렵 호텔 찾느냐 헤매면서 힘을 빼서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확실히 왕가평이나 조원이나 주연은 모택동입니다.
그것을 상징하듯 가게 앞에는 모택동 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냥 보통 기념품을 파는 곳인데.
이런 것도 여기서 파는 모양이죠?
저녁은 먹고 들어가야겠기에 식당을 찾아보는데, 호텔 바로 앞에 ‘천운산채면(川雲酸菜面)’이라는 곳이 있더군요.
소문난 맛집인지 안에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천운’이라는 것은 사천과 운남을 뜻할 텐데 아마도 그쪽 김치 비슷한 맛을 내는 채소을 가미한 국수인 듯 보였어요.
궁금하기도 해서 한 번 먹어보기로 하는데, 주문하면서 카운터 총각에게 많이도 혼납니다.
돈을 내면 주는 주문서를 가지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음식을 가져다주는데 이것을 못 알아 들어서리.
나온 음식은 우리나라 짬뽕 같은 색의 국수인데, 맛은 짬뽕과 다르고 김치라면 스프를 우동에 부으면 그런 맛이 날랑가.
아무튼 먹기에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호텔 건너로 청량산이 보입니다.
이것도 혁명 유지라던데 올라갈 기운이 일단 없고요, 그리고 내 방에서 보이는 풍경과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더군요.
패스.
그리고 보탑산.
여기도 패스할 랍니다.
호텔 창문 밖에 보이는 야경이 비싼 호텔 값을 조금은 아깝지 않게 해줍니다.
이 동네 혁명 성지 연안이 좋은 점은 입장료가 일단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호텔비는 좀 비싼 동네지만 입장료가 없으니 그걸로 만회하면 될 듯싶네요.
조원 혁명 구지 가는 방법
시내버스 노선 가운데 조원 혁명 구지 가는 것 많습니다.
골라서 타시고요.
요금 1원
입장료 없음.
양가령, 연안 혁명기념관, 양가평 혁명 구지
이것도 시내버스를 타면 된답니다.
모두 입장료 없음.
오늘의 지출
아침(밀가루 꽈배기와 두유) 3원
역 가는 시내버스 1원
연안 기차 차비 12.5원
연안 시내버스비 5회 5원
점심(비빔밥) 16원
택시비 6원
호텔 220원
물 2원
저녁(산채면) 1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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