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간성읍 광산리에서 진부령 정상까지.
식사를 한 광산리라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신리가 있다.
멀리 향로봉이 내려다보이는 동네.
그 동네 장신리.
내가 빡빡머리를 하고 훈련을 받던 그 동네.
괜히 그 동네가 가까워지는데 가슴이 뛴다.
지금 가는 이 길은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삼척으로 이동할 때 왠지 서러워 한 없이 울던 그 길이다.
트럭을 타고 있던 모두가 함께 신나게 울던 기억.
그대로 있을까, 아님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그런데 거짓말같이 짠하고, 30년 전 모습을 하고 있는 부대가 나타난다.
부대 안 군인들이 앉아 있는 마당도 옛날 그 모습 그대로이고.
내가 마치 그 안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 정도.
부대 정문 쪽으로 가본다.
간성천주교회 공소가 세워진 것 말고는 변화가 없는 부대 앞은 낯선 이의 방문에 다가서는 초병의 모습만 보인다.
초병에게 몇 가지를 물어본다.
지금은 신병 훈련소는 아니라고.
그리고는 힘들겠다는 위로의 말과 함께.
30년 전에 썼던 그 시설을 아직도 쓰고 있으니 이들이 참 불쌍했다.
우리나라 국방비는 다 어디로 갈까?
워낙 씀씀이가 많으니 그럴까 하다가도 이런 환경을 보면 참 한심스럽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젊은이가 19세기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 이런 시설 밑에서 산다는 거.
부대 앞으로 지나는 국도는 옛날 부러움이 잔뜩 담긴 길이었다.
저녁 무렵이면 진부령 쪽으로 가는 서울행 버스가 있었는데 그 놈을 보면서 저 놈을 타면 서울에 갈 텐데 하는.
그 길 너머로는 우리 훈련장이 있었다.
수류탄도 던지고 하던.
그리고 각개 전투 훈련을 가서 훈련 대신 열심히 나무를 베어 들고 내려와 우리 중대장 네, 소대장 네 땔감을 공급해주던 대한민국 육군 훈련병들.
시골스런 집의 방 한 칸을 세 들어 살던 소대장 안식구는 선녀처럼 다른 별세상 사람 같았는데, 그 손으로 어떻게 아궁이에 땔감을 때며 살았을까?
지금의 장신리 마을은 다른 동네와 비교해도 별 다름이 없는데 옛날에 보았던 이 동네는 왜 그리도 촌스럽고 불쌍해 보였을까?
그 때는 마치 조선시대 말기의 동네를 보는 것 같았다.
비포장의 길에서 날린 먼지로 집들은 뒤덮이고, 게다가 아이들은 새카맣고.
흐~~~
많은 세월이 흘렀다.
조금씩 경사가 더해가는 도로를 따라 오르면 장신리 유원지가 나온다.
귀에 익은 소똥령 마을.
산촌 마을의 특색이 많이 남아 있다는 데 길가에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멀리 진부령 정상이 보인다.
여기서 경사가 더욱 심해진다.
아직 진부령 정상까지는 10여 km가 남은.
그래도 큰 고개를 여러 개 넘던 능력으로 천천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오른다.
이제 3km남았다.
그 까이거...
곧 나오는 해발 400m 표지.
이게 뭐야?
그래도 생각해 보니, 해발 10m 정도에서 올라 왔으니 많이 올라 온 것 아닌가?
다시 해발 500m
여기서 정상은 멀지 않다.
생각보다 진부령은 높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힘도 덜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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