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풍경

서울 나들이 - 경복궁

정안군 2012. 2. 23. 07:56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가는 집사람과 동행을 하였다.

 

괜히 할 일이 없어서.


이거 원..


퇴직 후 삼식이가 되면 집사람만 졸졸 따라 다니면서 이것 저것 간섭을 하여 미움을 산다더만 내가 슬슬 그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일단 집사람이 좋다고 하니 미움 받을 일은 아닌 듯 싶다만.

 

하지만 오늘 서울 가는 본 목적은 요즘 1박 2일에서 나온 경복궁을 한 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언젠가 고시를 준비하면서 원서를 구하러 그 때 당시 중앙청 수위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참 오래 된 이야기이다.


그 때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그냥 중앙청 건물로 쓰던 시절이라서 지금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다가 오랜 논란 끝에 김영삼 대통령은 박물관으로 쓰던 조선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기로 결정을 하고는 일제 강점기 때 훼손된 경복궁을 원래 모습대로 되돌리기로 한다.


아픈 과거도 역사이니까 조선 총독부 건물을 그냥 놓아 두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조선의 대표 궁궐이었던 경복궁을 훼손하고 그 자리에 식민지의 상징인 총독부 건물을 지은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해 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철거한 것은 잘 한 일라고 생각을 한다.


금융 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그리고 조선 총독부를 철거하기로 결정한 것은 학실히(확실히)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큰 아들과 강남 코엑스에서 점심을 함께 하고는 집사람과 나는 지하철로 경복궁으로 향한다.


시간이 좀 늦어지긴 했지만 별 걱정을 안 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일단 경복궁 경내에 들어가니 막 수비대 임무 교대식이 끝나가고 있었다.

 


 

덩덩 북에 발을 맞추며 궁 수비대가 교대 의식을 마치고 퇴장하고 있었던 것.


좀 어설펐다.


모두 알바생인지 패기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그냥 화려하게만 꾸며 관광객 눈요기 정도로만 만든 것이 아닌 가 싶다.

 

아무튼 20대 시절에 이 자리 언저리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몇 십년 만에 여기에 오니 감회가 새롭다.


물론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총독부가 있던 곳일게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이 보인다.

 

물론 뒷 모습이지만.


참 사연도 많은 광화문이다.


임진왜란 때 전소 되었다가 대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진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궁궐의 남북 축에서 비켜나 옮겨지게 되고, 박대통령 시절에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모습으로 세워지게 된다.


천천히 정확하게 그리고 여유있게 지으면 좋으련만 우리 가카의 의지로 속도전이 되어 예상보다 빨리 완성되었고 그 영향으로 현판이 세로로 금이 가는 등 마지막까지 구설수에 오른 참으로 비운의 문이 되시겠다.


임진왜란 때에는 한양을 버리고 임금이 도망을 치자 왜군보다 한양의 노비들의 손에 의해 불 타 버린 광화문.


무너져버린 왕조의 위엄을 되살리고자 대원군에 의해 다시 재건이 되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제 강점기 시절 광화문을 철거하려는 일본 식민 지배층에 야나기 마사무네가 참으로 예술품이라고, 이런 문을 철거하는 것은 야만이라고 호소(?)를 하여 없어지는 것은 간신히 면하고 자리를 옮겨가는 것으로 끝났던 우리의 광화문.


육이오 때는 시가전으로 문루가 소실되고 참으로 구구절절 우리 민족 만큼이나 사연도 많다.


이제부터라도 관리를 잘해서 숭례문처럼 어느 날 갑자기 불이 나서 타버리는 사건은 일어나질 않기를 빌어본다.


 

이 자리에서 역시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것은 좌청룡  인왕산이다.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는 인왕산.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그 선이 힘이 있어 보인다.

 

언제 한 번 올라보면 좋겠다.



 

흥례문

 

여기서 입장권을 받는다.

 

실질적으로 돈내고 구경할 수 있는 경계가 된다.


안을 구경하고 싶으면 3,000원의 입장료를 내야 된다.


그런데 흥례문에 서 있던 안내인이 모두들 입장을 서두르란다.


4시에 입장을 종료시킨다고.


이게 뭔 일이랴?


알고 보니 11월 부터 2월까지 동절기는 9시에 개궁을 하여 5시에 문을 닫는데 관람 마감 1 시간 전에 입장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지금 들어가도 1시간 남짓 밖에 구경할 수 없다는 말일세 그려.


일찍 올 껄.


그러나 껄껄 해봐야 별 수 없다.


그러니 서둘러서 구경을 하는 수 밖에.


중국 관광객, 일본 관광객, 서양 관광객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띤다.


역시 경복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

 

 

흥례문을 지나면 북악산(백악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이것은 왕족과 일반백성(신하)들과의 구분을 하는 경계선 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영제교를 지나면 근정문이 나온다.

 


 

근정문 앞 계단의 석장식이 눈에 들어 온다.

 

서수(瑞獸) 해태와 봉황인 듯 싶다.


 

근정전이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大禮)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1박 2일에서 유홍준님이 알려준 포인트에 서서 근정전을 바라보니 과연 좋다.

 

왼쪽으로는 인왕산이 오른쪽으로는 북악산이 근정전을 감쌓듯 마치 근정전이 날개를 단 듯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공간의 미학이라고 할까?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산과 어울려 건물을 배치할 수 있는 여유와 멋을 가진 분들이라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에서 벅찬 감동이 차오른다. 

 

 

1박 2일에 나오는 차일을 칠 수 있는 고리이다.

 

 

근정전 앞은 많은 사람들도 붐볐다.

 

옛날 조선 임금의 즉위식이 열리던 장소였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연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이 많은 조선의 임금 중 선조까지는 여기서 즉위를 했다는 말일게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있었고 그 때 경복궁은 불에 타서 빈터로 있다가 대원군 때 다시 지어지게 되니 그 이후 왕들은 경복궁과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왜란 이후로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세우기 까지는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했다 한다.

 

아 참, 태조는 개성에서 즉위를 했으니 제외하고.

 

 

옥좌.

 

임금님 자리.

 

이 자리에 앉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고.

 

처음 보는 장소이지만 사극에서 많이 보아서 인지 낯익은 곳이었다.


 

천정에는 용이 2 마리.

 

아마도 고종이 황제 취임을 하고 만든 것이 아닐지.

 

 

그 다음으로 만나는 곳은 사정전이다.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신하들과 일상으로 정사를 논의하던 편전인데 편전(便殿)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이다.

 

또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이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思政殿)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정전 영역으로 통하는 사정문침전영역으로 통하는 향오문 사이에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

 

그러나 사정전은 다른 역사가 펼쳐진 장소이기도 하다.

 

자기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임금 자리에 오른 세조.

 

그 세조에게 반기를 든 사육신들이 문초를 당하고 각종 악형을 받았던 곳도 이 사정전 뜰이었다. 

 

 

이제 정치 공간인 외전을 벗어나 생활 공간인 내전으로 향한다.


강년전

 

강녕전(康寧殿)은 왕의 침전에 해당하며, 월대에서는 의례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교태전과 아미산

 

교태전 (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인데 답답한 궐내에서만 지낼 왕비를 위해 작은 동산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미산이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조성할 때 나온 흙으로 만들었단다.

 

자경전 뒷 뜰 너머로 보이는 청와대와 북악산.

 

 

향원정이다.

 

향원정은 경복궁 중건을 마친 뒤 건청궁을 지으면서 새롭게 만든 왕실 전용의 휴식 공간이었다고.

 

여기서는 북악산이 한층 더 가까이 보인다.

 

여기서 해설사에게서 해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관람 정보지에 일반 안내 시간이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듯 싶다.

 

확실히 그녀는 나보다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

 

당연한 소리인가?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많이 인용하던데 나야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으니 별로 도움이 되지가 않았다.

 

 

건청궁은 비운의 사연을 전하는 건물이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이런 내용으로 정리된다.

 

건청궁(乾淸宮)은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나서 고종 10년(1873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위치한다.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앞에는 향원지라는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정자를 꾸몄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가미하여 지었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성을 하였다.

 

담장에는 벽돌을 이용해서 아름다운 꽃무늬를 꾸몄다.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지 않을 때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가롭게 휴식할 목적과는 달리 이 건물은 조선말기 정치적 혼란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들을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에 서재인 관문각은 러시아인에 의해서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경복궁 안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인들이 궁궐을 습격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이 건물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였다. 

 

이 사건 이후 건물은 한 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말았으며, 2006년에 와서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곤녕합 사시향루

 

이 언저리에서 민비 즉 명성황후는 일인들에게 시해를 당한다.

 

언제나 향내가 나는 누각이라는 뜻일텐데, 사연이 참으로 한스럽다. 

 

 

아담한 건청궁을 뒤로 한다.

 

이 때부터 방송에서 시간이 다 되었으니 얼른 나가라고.



 

집옥재와 태원전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이다.

 

이제 중심축에서 벗어난 길을 따라 내려 온다.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경회루.


 

경회루가 담 넘어에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록 호수 건너지만 경회루가 잘 보이는 곳이 나온다.

 

경회루하면 역시 만원 지폐가 생각난다.

 

IMF가 터졌을 때 호수 속으로 기울어져가던 경회루의 모습도 생각이 나고.

 

전두환이가 반란을 성공시킨 다음 여기서 파티를 열었다는 것도.

 

지가 왕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고 보니 전두환은 자신을 칭할 때 본인이라는 말을 꽤 좋아 했었다는 생각이.

 

과인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는 못하고 본인으로 대신했던 모양.


 

수정전인데 옛 집현전 터란다.

 

집현전이라.

 

세종 때 궁궐 안에 설치를 했는데 임금은 사정전에서 열심히 공부하다가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다하니 집현전과 사정전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글에선가 공부하다가 잠 든 신하에게 왕이 자기 윗옷을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글이 있었는데 거리를 봐서 신빙성이 많이 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세종 때 함께 집현전에서 열심히 학문에 몰두하던 신하들은 세조 때 그들의 운명이 나뉜다.

 

세조 편에 선 정인지와 신숙주, 그리고 단종 편에 섰던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지는 석양의 빛을 받은 근정전 옆모습이 참으로 곱다.

 

그렇지만 얼른 나가라는 독촉 방송에 마음은 바쁘기만 한데, 이때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성삼문이 죽으러 가면서 읆었다는 시조이더이다.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擊鼓催人命)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回頭日欲斜)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니         (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今夜宿誰家)

결국 인생 무상에 권력 무상인데.

그런데 이 시조는 어떻게 전해지게 되었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읆은 시조를 누가 받아 썼을까 궁금해진다.

 

모든 역사를 뒤로 한 채 경복궁은 이제 또 하루를 접으려고 하고 있다.

 

회랑 너머로는 현대 문명의 상징인 고층 건물들이 또 다른 세상을 펼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