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통일전망대까지 輪行記

주문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3

정안군 2011. 9. 6. 10:02

 

3. 남애에서 남애 해수욕장 언덕 옛 근무지까지

 

부활절이었다.

 

아니 그 날이 부활절인지도 몰랐다.

 

소대에 배치되어 첫 밤샘 근무를 하고 소초로 돌아오니 중대장이 나를 부른단다.

 

이병을 부를 일이 뭐가 있을까?

 

나도 궁금하고 다른 부대원은 더 궁금하고.

 

중대에서 대기할 때 정리해준 상담록을 마무리하라고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소대에서 중대는 바로 언덕 넘어.

 

다른 병사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들 잠자리로 들어갈 때 나만 중대본부로 가보니 다른 소대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 부활절이라서 개신교 신자 병사들을 남애리 교회에서 초대했다는 거.

 

버스를 타고 남애교회에 가서 일단 예배를 드리는데 시골집 사랑방이었다.

 

밤새 보초를 섰으니 얼마나 졸렸는지 졸다 깨다 하며 비몽사몽간에 예배를 마치니 백설기 떡과 콩나물국이 우리를 위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

 

이게 사실 오늘의 주제였다.

 

점심 식사 대신으로 떡과 콩나물국을 신나게 그야말로 신나게 먹었고 언젠가 이 고마운 교회에 다시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사실 군대를 나온 뒤 이 근처를 지나가긴 했고 지나갈 때마다 언덕 위에 이 교회가 바로 그 교회일까 몹시 궁금했었다.

 

 

바로 오늘 확인이 가능할까?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사람을 찾아보는데 영 인기척이 없다.

 

한참 주위를 돌다가 교회 안이나 구경하자 하고 안에 들어가니 웬 노인 한 분이 형광등을 갈고 있었다.

 

아~~

 

맞았다.

 

지금부터 무려 30년 전 부활절에 나에게 떡을 준 그 분이었다.

 

여러 말을 나눴지만 어쨌든 성도들에게 대접을 받았던 그 때 한 사람이 그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방문을 했었고 그 때 먹은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는 인사를 드리고 갔다고 전해달라고 말을 맺었다.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 교회 근처에는 남애초등학교가 있다.

 

 

우리 소대와 3소대 축구 경기를 위해 방문을 했던 곳.

 

나는 운동에는 젬병이라서 축구는 관심이 없었고 모처럼 부대 밖 공기를 마시는 게 좋았던 기억만.

 

축구는 우리가 졌고 그것 때문에 소대 분위기가 한동안 험악했었다.

 

돈내기에서 져서 내 월급 일부도 들어간 돈을 뺏겼으니.

 

 

매호와 매호천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서니 남애해수욕장과 우리가 자고 먹던 소초 자리가 멀리 보인다.

 

다리를 건너 현남중학교를 지난다.

 

 

이 중학교에서 아침마다 축구를 하곤 했는데 밤샘 근무에 아침을 먹기 전이라서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지기라도 하면 우리 소초로 올라가는 길이 오리걸음길이 되었으니.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여자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이야기들.

 

그래서 여기서 축구와 군대 이야기는 그만

 

길을 따라 작은 언덕을 오르니 우리 소초 들어가던 길이 나오는데 대형 주차장도 마련되었다.

 

웬일이래?

 

 

 

잘 보니 휴휴암(休休庵)이라는 절 때문에 주차장이 생긴 듯하고, 우리 소초 가던 길은 비포장에서 콘크리트길로 바꿨을 뿐 그대로였다.

 

 

길을 따라 오르니 내가 근무하던 소초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잘 살펴보니 새로운 건물도 몇 채 들어 섰지만 우리가 밥을 먹던 식당과 숙소가 그대로 있네.

 

 

 

 

언덕 아래와 중대본부가 있던 언덕은 절이 다 차지하고 있고.

 

소초 자리에 서면 절벽 아래로 파도가 치던 절경이 있었는데 그것을 볼 수는 없었다.

 

언젠가 부식을 타러 이리로 내려왔었다.

 

그 때 부식차의 인솔자였던 처음 보는 대위는 우리 소대장이 싸가지 없어서 너희들이 대신 맞아야 된다고 하며 손바닥을 몽둥이로 때렸다.

 

맞은 놈들은 우리고 그 싸가지가 없다는 우리 소대장은 정작 우리가 말을 안 해서 알지도 못했다는 거.

 

맞은 우리만 새 되었다는.

 

바로 그 장소에는 대형 버스들이 서 있다.

 

졸병은 이래저래 졸병이었다.

 

지금 그 일을 생각하니 웃음만 나온다.

 

시간 여유가 있어 휴휴암에 오른다.

 

 

작은 언덕을 오르니 다른 세상이 아래로 펼쳐진다.

 

 

엄청난 크기의 절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그러고 보니 내가 근무한 장소가 명당은 명당이었나 보다.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다 우리 소초가 올려다 보이는 곳에 선다.

 

소초 아래로 절벽이 있고 그 근처는 경치가 좋아 고참 들 추억거리를 만들 때 내려와 사진을 찍곤 했다.

 

 

 

발 아래로 바다가 펼쳐져 있다.

 

30년 전 한 젊은이가 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하여 이 근처에 부대 배치를 받았었다.

 

내가 이 소초에 올 때 그는 상병이었으니 이 바다와 꽤 친숙해져 있었겠지?

 

어느 봄날.

 

그의 친구들이 면회를 왔다.

 

원래 해안 소초에 근무할 때에는 외출이나 외박이 안 되지만 휴일이라서 그 소대 소대장은 그 친구에게 외출을 허락했었나 보다.

 

이들은 젊은 날의 짧은 자유를 즐기는 친구를 위해 하조대에서 작은 배를 그냥 탔고 그 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비상이 걸리고 바다를 수색했으나 빈 배만 찾았다고.

 

이 소식을 들은 이 젊은 친구의 아버지는 부랴부랴 우리 중대를 찾아 왔었단다.

 

들은 말에 의하면 이 친구의 아버지는 육이오에 장교로 참전했던 예비역.

 

여기서 그는 ‘나도 전투에서 남의 자식을 죽이기도 하고 실종시키기도 했는데 내 아들이 그렇게 되었다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더란다.

 

그리고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대로 돌아 섰다고.

 

당시 우리 중대장은 육사 출신이고 그 소대 소대장은 서울대 ROTC 출신이었는데 그 친구 아버지의 대담함과 학력의 끗발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냥 조용히 묻혀 버렸다.

 

며칠 동안 우리 부대에는 해안가에 이상한 물체가 보이면 신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피곤에 찌든 우리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 바다에 내 앞에 있다.

 

소초 아래 바위는 지금 내려 갈 수는 없다.

 

허나 그 때 중대장 따까리 김 병장은 나를 데리고 내려가 사진을 찍었었지.

 

유일하게 이 소초에서 사진을 찍은 날이었다.

 

젊은 날의 내가 어디선가 지금의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은데 망루에는 다른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저 친구도 언젠가 이 자리에서 지금 소초를 올려다보면서 옛 생각을 할까?

 

이렇게 추억거리 두 번째가 만들어진다.

 

언젠가 이 자리에 다시 오면 이 절에서 소초를 올려다보던 생각도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