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통일전망대까지 輪行記

주문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2

정안군 2011. 9. 5. 13:25

 

2. 주문진에서 남애리까지

 

사실 주문진은 나에게 추억의 장소이다.

 

하긴 나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추억의 장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주문진에는 있었다는 거.

 

그것은 바로 군대 시절의 추억이다.

 

사실 군대에 가기 전 나는 강원도와는 큰 인연이 없었다.

 

굳이 인연이라면 그냥 대학 졸업 여행으로 춘천이라는 동네를 갔다 온 것 뿐.

 

그것도 요즘 유행하는 1박 2일로.

 

서울 청량리역에서 모두 만나 기차로 춘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댐을 구경하고, 밤에는 강원대 여학생과 미팅을 했는데 그리고는 남은 추억도 기억도 없다.

 

지도교수로 따라간 박 모 교수가 좀 거시기한 사연을 남겼다는 거 하고.

 

하지만 강원도라고 해도 춘천은 영서지방이라는 거.

 

영동지방은 아니다.

 

그러니까 영서와 영동을 나누는 태맥산맥을 넘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던 나에게 영동지방 구경을 선사한 것은 국방부였다.

 

그러고 보면 국방부는 잘 한 일이 너무 많다.

 

영동지방 구경 한 번 못해본 놈을 국비로 구경을 시켜주다니.

 

어쨌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안 있어 군에 입대를 하게 된다.

 

불과 4일 뒤에.

 

우리 국방부 덕에 우리들은 남들보다 졸업식까지도 빨리 했다는.

 

사연이야 길지만 나중에 쓸모도 없어지는 공업계 고등학교 교사를 일찍 만들려는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문교부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이다.

 

어쨌든 나는 조치원에서 입영열차를 탄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춘천 103보충대.

 

다시 온 춘천이지만 처음 왔을 때하고는 처지가 완전히 다른 몸이 되었다는 거.

 

민간인에서 군바리로.

 

다시 말하면 여대생들이 금값으로 치던 대학 4년생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군바리로 신분이 바뀌어서 춘천에 왔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부대 배치를 받게 되는데.

 

103보충대는 크게 보면 강원도 전방에 있는 보병사단에 병사를 공급하는 곳이어서 대개가 힘든 근무지였다.

 

그런데 한 곳 예외가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동경사.

 

그 이름도 찬란한 동해안경비사령부였다.

 

여기는 보리 카튜사라고 해서 정말 편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미군이랑 함께 노는 카튜사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편한 부대라는 거.

 

바로 내가 이 동경사에 배치를 받았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동경사라고 배치를 받은 예비 훈련생들의 환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린다.

 

어쨌든 인제 원통으로 가는 12사단 애들과 우리 동경사는 그 이름도 찬란한 한진고속버스를 타고 홍천을 지나 한참을 같이 갔다.

 

다른 부대는 트럭을 타고 갔다는 후문.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 같은 비포장길을 달려 인제를 지나고 원통을 지났다.

 

그 때까지는 12사단 배치받은 친구와 마음이라도 동행을 했는데.

 

그러다가 원통에서 12사단과는 갈라져 우리는 진부령을 넘었다.

 

홍천까지는 포장 도로였지만 홍천부터는 비포장.

 

엄청난 먼지 속에 진부령이라는 고개를 넘었는데 점점 더 궁금증이 커졌다.

 

아니 이런 산속으로 가는 우리들을 왜 다른 병사들이 부러워했는지.

 

드디어 부대에 도착을 한다.

 

동경사는 바다를 지키는 부대라더니 바다는 어디서든 보이지 않고 앞에는 산, 뒤에는 더 높은 산이 있었다.

 

다만 옆으로 길게 뻗은 북천강이라는 큰 내를 따라 동서 방향으로만 터져 있는 장신리라는 동네가 우리 부대가 있는 소재지였던 거.

 

버스가 도착할 때 우리를 반기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1주일 먼저 들어 온 선임.

 

그 때는 그 사실을 몰랐고 웬 거지들이 나타났나 했다.

 

전부 우리가 보충대에서 출발할 때 점심 대신으로 준 건빵을 달라고 했으니.

 

우리야 그 당시 배에 기름기가 많아 건빵이야 손도 대지 않았던 거.

 

그리고 1주일 후, 우리 동료 대부분은 같은 거지가 되었다.

 

아무튼 진부령 넘어 장신리라는 곳 거기서 6주 보병 기초 훈련을 받는다.

 

그 때 사연이야 눈물 없이는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리고는 마지막 주 57연대로 배치를 받은 동료들과 삼척으로 출발을 한다.

 

또 연대 본부가 있는 삼척에서 3중대로 배치 받은 5명은 인솔자를 따라 다시 양양군 현남면 인구리 해안가 야산에 자리 잡은 중대 본부로 팔려가게 되었다.

 

며칠을 중대 본부에서 빌빌대던 나는 동료들과 떨어져 화기소대로 혼자 배치가 되어 말하자면 내 집 자대로 이동이 끝났던 것.

 

우리 화기 소대의 영역은 남애 해수욕장 언저리였다.

 

여기가 내 처음 10급 공무원 생활 첫 직장이었다.

 

낮과 밤이 바뀌어 낮에는 쪽잠을 자고 밤에는 무장을 하고 100원짜리 외박을 나가던 근무지.

 

해안으로 침투하는 적 감시보다는 뒤에서 올지도 모르는 순찰자 감시가 주 업무였다.

 

미칠 것처럼 힘들고 어렵던 그 생활.

 

거기서 1달이 넘게 근무를 서던 나는 연대본부로 파견을 나가게 되어 그 추운 봄날의 초병 생활을 마친다.

 

5개월 뒤, 연대본부에서 파견을 마친 나는 이제 해안에서 내륙으로 근무지를 옮긴 우리 중대로 복귀하는데 그 복귀지가 주문진 해수욕장 바로 앞의 부대였던 것.

 

부대 이동한 것을 지도에서 크게 점을 찍으면 춘천에서 간성읍 장신리로, 그곳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남애리, 남애리에서 다시 삼척 그리고 주문진.

 

다해봐야 6개월이지만 사연을 들면 60년이 부족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군바리 출신들이 다 그러겠지만.

 

주문진 부대에 있을 당시 나야 그 유명한 신병 육 개월에 작대기 두 개인 일병이라서 주문진에 나갈 일이 없었지만 하늘같은 고참들 외출이나 외박으로 주문진에 갔다 온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대개가 주문진 똥치 이야기.

 

워낙 저급한 이야기라서 여기서 표현할 수는 없다.

 

이렇게 대관령을 넘으면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군 생활을 접었다.

 

군대 생활한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는 말이 있고, 바닷가 근무가 너무 힘들어서 겨울 바다 이야기하는 여자는 절대 사귀지 않겠노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법.

 

군에서 나온 후 이 동네는 주문진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설악산 가는 길에 잠깐 스치듯 지나갔지만 이번 자전거 여행을 통해 추억을 다시금 새기고 싶었다.

 

주문진버스터미널에서 주문진 어항 쪽으로 길을 잡는다.

 

 

조금 도는 길이지만 경치가 일품이고 뭐니 뭐니 해도 고갯길이 없으니까.

 

생각대로 주문진항은 볼거리도 있었고 경치도 좋았다.

 

 

 

많이 정비가 되어 옛날의 혼잡한 모습은 많이 줄어들었고.

 

등대가 있는 언덕을 돈다. 

 

 

그런데 어디가나 거지럭거리는 것은 전선줄.

 

우리나라도 예외는 없구나.

 

하지만 하늘은 곱다.

 

와~~

 

바다 색깔은 더 곱다.

 

 

 

 

남쪽 동네 바다만 고운 줄 알았더니 우리나라 동해도 명품이네.

 

이 사진 색깔은 너무 아니다.

 

너무 너무 예뻤는데.

 

주문진해수욕장까지 달리다 4차선 국도로.

 

 

바로 향호가 나온다.

 

바다 쪽으로는 아마 30년 전에 있었을 다리가 아직도 남아 있어 자전거 도로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

 

 

우리 내륙대대 바로 옆에 있던 그 바로 향호.

 

얼마 있지 않았지만 내 젊은 한 때 머물던 장소인데, 그 주변도 많이 바뀌었다.

 

표준 모래를 만들던 공장은 자취를 감추었고, 방음벽으로 부대 안을 보기가 어렵다.

 

 

 

좀 기웃대다가 군 시절 내 대학 동기가 빨래하고 지나가던 나를 보고 반가워했던 지경리 해안 쪽으로 방향을 튼다.

 

멋진 도로가 이어진다.

 

중간에 해안초소가 있는데 한 병사가 망루에서 근무 중.

 

 

여름 긴 낮, 대개의 병사들은 잠을 자고 있겠지만 이 친구는 혼자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현남 IC에서 7번 도로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은 군 시절 내가 흘러 물 사정이 좋지 않았던 우리들은 빨래감을 가지고 가 빨래와 목욕을 하곤 했다.

 

 

해안도로는 남애리 남애항까지 이어진다.

 

남애항에서 언덕을 오르니 한 교회가 나오는데.

 

바로 그 교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