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섬서 2014 여행

거친 땅, 거친 역사 섬서성을 찾아서 - 미지 米脂 140519(하) 이자성 행궁

정안군 2014. 6. 10. 11:31

틈왕(闖王) 이자성(李自成)


1605년 10월 3일(?) 섬서(陝西)성 미지(米脂) ~ 1645년 호북(湖北)성 사망

.

중국 명대(明代:1368~1644)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를 제위에서 내 몰은 중국의 반란군 지도자.

1631년 대기근 끝에 중국 북부의 질서가 흔들리게 되자 지방관이었던 이자성은 반란군에 가담했다.

그는 섬서성 서북부에 사령부를 두고 스스로를 '틈장'(闖將:맹장)이라고 불렀다.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던 그는 차츰 부하들을 늘려 인접한 성(省)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1639년 이후 몇몇 학자들이 이자성의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이 학자들의 충고에 따라 자기 휘하 군졸들에게 약탈을 금지시켰고, 몰수한 식량과 토지를 빈농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영웅적인 자질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 일부러 퍼뜨렸다.

또한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지역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여 부하들에게 관작(官爵)을 수여했으며,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1644년 대순(大順) 왕조를 창건하고 초대 황제가 되어 수도인 베이징[北京]으로 진격했다.

이자성은 숭정제를 배신한 환관들에 의해 쉽게 수도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그곳을 오래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명에 충성하던 오삼계(吳三桂:1612~78)가 동북부 변경에 있던 만주족을 중국으로 끌어들여 명의 회복을 도모했기 때문이었다.

명과 만주족의 연합군에 의해 그는 수도에서 쫓겨나 중국 북부의 호북성 통산(通山)인 통성(通城)으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자성이 탈출하여 호남(湖南)성 현재 상덕(尙德)시 석문(石門)에 소재한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설이 아직도 전한다.


이자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다음 중국 대륙은 운남(雲南)의 오삼계(吳三桂), 광동(廣東)의 상지신(尙之信), 복건(福建)의 경정충(耿精忠) 등의 삼번(三藩)과 청(淸)제국의 주인이 된 강희제(康熙帝)가 다음 중국 역사의 주인공으로 무대를 장식하지요.

그러나 결국 청 강희제는 삼번과 대만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사상 최대 넓이의 제국을 완성하여 그들의 전성기를 열게 됩니다.

이 시절 우리 조선에서는 효종이 불벌 어쩌고 하며 군사력을 길러 삼번 세력과 연결을 시도하지만 왜란과 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국력으로는 그저 언감생시에 불과했지요.

아무튼 청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중국 대륙의 그 넓은 땅덩어리입니다.

만주족은 몽골족과 연합하여 청을 세우면서 중국 동북부를 확실하게 중국 대륙과 연결시켰고, 덤으로(?) 신강까지 얻게 만들었지요.

또 하나의 보너스로는 대만까지.

이자성의 행동은 역사에서 보면 작은 몸짓이었지만, 나비 효과라고나 할까요, 그 후폭풍은 엄청난 것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이자성의 출생지가 은주(銀州) 즉 미지라는군요.

이번 여행이 이자성의 행적을 쫒아가는 여행도 아니고 특별히 실패한 영웅(?) 이자성에 대한 관심도 없지만, 여기 와서 이자성 행궁을 안 볼 수는 없었어요.

강씨 장원 구경을 마치고 시내에 돌아 와 이자성 행궁을 향해 갑니다.



이 문을 따라 가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그런데 멍청하게도 내가 묵고 있는 호텔 앞으로 보행가가 있고 그 보행가(步行街) 끝이 이자성 행궁인데 차도를 따라 한참을 돌았다지 뭐에요.



그나마 길을 따라 걷다가 뷔페도 만나고 또 김태희가 할지도 모르는 김밥 집을 만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일까요?

아, 김태희가 주인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그냥 태희네집 김밥이니.



그 김밥집 앞에는 홍성(鴻盛)그룹이 있었어요.




이 그룹의 소유로 해수 사우나도 있고 그 건물 뒤에 홍성 자조(自助)찬청(餐廳)이 있는데, 점심을 과자 부스러기로 때운 터라 배가 고파서 반가운 마음에 가보았지요.

3시가 좀 넘은 시간인데, 그 시간은 점심 타임도 아니고 저녁 타임도 아니어서 이용할 수 없다더군요.

아무튼 이렇게 뷔페식당을 발견했으니 간단히 점심을 먹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마음을 정리하고 배가 많이 고프더라도 오후 뷔페 타임을 위해 점심은 그냥 건너뛰기로 했지요.

배가 고파야 뷔페 가서 아까운 마음이 덜 하지 않겠어요?

그나저나 해욕(海浴)은 바다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바닷물을 퍼 와서 쓰는 것은 아닐 테고.

그게 많이 궁금했지만 너무 벌건 대낮이고 또 확인하려면 돈이 들어가니 일단 패스.


이자성 행궁 대단하지 않은 볼거리.


이자성 행궁은 미지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입장료는 안내판에 의하면 30원인데, 25원을 받네요.

뭔가 수상해서 안내판에는 15원으로 되어 있는데 왜 25원이냐고 우기니 5원을 더 내줍니다.

음, 확실히 뭔가가 있고만.

더 용기를 내서 더 박박 우기니 다시 5원을 내주더군요.

그래서 최종 입장료는 15원.

중국에 대한 지식이 짧은 나는 그 당시 원래 입장료는 30원인데, 지금은 15원으로 해준다는 뜻인 줄 알고 박박 우긴 건데, 나중에 사진을 확인하니 원래 입장료는 30원이고 할인 요금이 15원이더군요.

그런데 왜 25원을 받았고 박박 우기니 나중에 15원으로 바뀌었는지는 도저히 알 수는 없습니다..

결론은 그냥 15원 벌었다는 것.

아무튼 중국 사람들이 돈에 그렇게 넉넉한 사람들이 아닌데 참 이상합니다.




넓은 마당에는 천단을 닮은 건물과 행궁 그리고 이자성 동상이 있는 아주 단출한 분위기입니다.

언덕 너머로는 동굴 집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무들이 거의 없어 민둥산 분위기고요.



아카시아가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은 아카시아와 버드나무 꽃과의 동행이기도 했습니다.

버드나무 꽃 한자로 하면 유화(柳花)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 부인.

유화 부인의 아버지이자 고주몽의 외할아버지는 하백(河伯)

이자성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버드나무는 벼락이 쳐도 벼락에 맞는 경우가 없어 신목(神木)으로 불리고, 이 신목은 샤먼들이 제천 의식을 할 때 필수품이었다지요.

그렇담 이런 상황으로 판단하면 고주몽의 외척은 초지의 호수 가에 살던 부족 가운데 강력한 힘을 가졌던 샤먼 일가였다는 방증이라더군요.

그 당시는 제정일치 사회였으니 지배 계급이었고요.

초원에서 말을 타던 유목 민족이 호수 가에 살던 정착민들과 결합을 해서 태어난 사람이 주몽이겠지요.

말을 타던 우리 조상들.

기마민족.

그러고 보면 옛날 장군들의 동상은 거의 다 말을 타고 있군요.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라야 제대로 폼이 나는 모양이지요?







동상을 지나면 높은 계단으로 이어지고 그 꼭대기에는 몇 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자성 사당인지 박물관인지 그런 분위기의 것들입니다.







몇 개 진열된 진열품들도 거의 모조품이라서 별 흥미도 없었네요.


그리고 또 몇 개의 당시 상황도.

벼리 별 일들이 있었던 중국에서 이자성 정도의 일이야 사실 별 것도 아니지요.

다만 이자성 집권 초기에 공산주의 사상과 비슷한 정책을 펼쳐 후세 공산주의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것보다는 명 이후에 이자성이 집권을 했더라면 한족이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도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오랑캐 만주족에게 나라를 넘겨주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랄까 그런 것들이 여기 분위기를 좌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자성 박물관 뒤에는 미지에서 여성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들을 소개한 건물들이 있더군요.

이자성과 무슨 관련도 없이 뜬금없이.

그래도 대단하신 분이기에 전시했을 것 같아 살펴보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의 사진은 조선(북한)에서 활동하던 시절 한복을 입고 찍은 것도 있습디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조선의 혈맹이기도 했지요.




높은 곳에서 보니 미지 시내와 이자성 행궁 뒤편의 동굴 집 모습들이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저런 동굴 집에서 살고 있나 봐요.



이자성 행궁 너머에 뭔가 건축물이 보이는데.

가 볼까 하다가 생략.

일단 길을 잘못  들었고, 돌아가자니 힘이 들어서리.

나중 이야기입니다만. ^^





천단 옆 건물은 종이 공예 전시장입니다.

종이를 접어서 오려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오전에 다리품을 많이 팔아서인지 다리가 아파오니 관심도 없습디다.

다만 이런 공예 풍으로 거리 곳곳 안내판의 문양을 삼은 것은 보기가 참 좋았습니다.

거의 섬서성 끝자락이던 정변(定邊)까지 이어지더군요.



이자성 행궁.

입장료가 15원이니, 딱 그 정도의 구경거리였습니다.

아무튼 대충 행궁 구경을 마치고, 호텔에 와서 쉬다가 뷔페로 향합니다.


뷔페에서 모처럼 신나게 먹기.


요금은 일반이 48원이고 오리고기를 포함하면 58원이라고 해서 오리고기 포함하는 식사를 한다고 했는데, 계산서는 48원 짜리.

이렇듯 실컷 내 의사를 표현한다고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자기들 마음대로랍니다.

아무튼 모처럼 기름기가 많지 않은 음식을 넉넉하게 먹을 수가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맥주를 비롯한 음료는 가격에 포함되어 있다더군요.

하지만 끽해 봐야 맥주 한 병에 오렌지 음료 작은 것 한 병을 먹으니 땡이네요.

배가 넉넉하게 큰 자티님이 가시면 본전을 뽑겠지만, 위소한 나로서는 아무래도 본전도 못 건지는 것이고.

식구들과 함께 온 사람들도 있고, 동료들과 함께 온 사람들도 있어서 이른 시간이었지만 손님은 많은 편이었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걷기도 힘든 발걸음으로 호텔에 돌아오니 딸네미가 아는 것 같은 몇 개 안 되는 영어 단어를 써서 인사를 합니다.

“하이”

그려, 그나마 그것만 해도 반갑단다.

호텔에서 내일 행선지를 가지고 고민을 좀 합니다.

버스를 타고 진나라 장군 몽염이 있다는 수덕(绥德)을 함 가볼까 아님 기차를 타고 그냥 연안(延安)으로 뺄까.

결론을 내립니다.

꿈에 몽염이 나타나 수덕에 와서 나를 한번 보고 가라 하면 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연안으로 가기로.

꿈에 몽염이 과연 나타날까요?

그러고 보니 꿈과 몽염.

어디서 많이 듣던 돌림자가 있네요.

몽염의 몽자가 꿈 몽(夢)자가 아닐까요?

몽즙할 때 그 몽....

그렇담 몽염은 정몽염? ^^


* 강씨 장원 가는 법


이자성행궁 사거리에서 7번 버스를 타고 강씨 행궁 앞에서 내림.

입장료 30원.

미지에서 강씨 장원을 보고 가현으로 가는 것 추천.

미지에서 가현 가는 버스와 가현에서 유림 가는 버스 많음.

먹을 거리 파는 곳 없으니 미리 물과 간식 준비할 것.


* 이자성 행궁


시내에서 멀지 않으니 걸어 갈 것.

입장료 15원(?)


* 오늘의 지출


유림에서 미지 행 버스비 25원

아침 식사(밀가루 꽈배기&두유) 5원

호텔 100원

강씨 장원 왕복 교통비 4원*2 8원

강씨 장원 입장료 20원

과자 + 물 2병 5원

저녁 뷔페 48원

물 1병 2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