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섬서 2014 여행

거친 땅, 거친 역사 섬서성을 찾아서 - 미지 米脂 140519(중) 강씨 장원

정안군 2014. 6. 8. 19:20

강씨 장원은 역시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오늘 온 강씨 장원은 중국에서 유일한 성루(城壘)식 동굴 집 장원(庄園)이랍니다.

성루식에 밑줄 쫙, 그리고 동굴 집에도 밑줄 쫙.

일반적으로 장원이라는 형태는 지방의 토호나 같은 성씨 끼리 집단으로 거주하는 형태를 말하는데, 치안이 불안한 시골 벽촌에 출몰하는 도적 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등의 기능을 했기에 작은 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지도를 보면 뭐 다른 곳에도 많긴 하지만, 앞에 성씨를 붙인 동네들 예를 들면 강가구(姜家溝), 마가평(馬家坪), 엄가장(嚴家庄) 같은 형태의 이름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는 집성촌이 많았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지금이야 안정된 세월을 지내지만, 중국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험한 시절이 있었나요.

평화로운 시절보다는 전란이나 외적의 침입 등 험한 세월이 훨씬 많았지요.

아무튼 이 강씨 장원을 만든 사람은 강요조(姜耀祖)로 할아버지가 농업과 상업을 병행하여 재산을 축척하였고 이를 이어받은 강요조는 섬북(陝北) 지역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강요조가 청(淸) 광서(光緖) 연간에 막대한 자본을 들여 16년 간 직접 감독하면서 이 장원을 지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하필 자리를 잡아도 지주의 원수(?)인 홍군이 이곳에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으니, 언젠가부터 인지 이곳은 더 이상 지주였던 강씨 일가의 소유는 아니었겠죠?

양가구의 마씨 네들처럼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소유였던 장원을 기부나 했으면 속이나 덜 아프고 후세에 칭찬이나 받았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나 봅니다.

아무튼 이 강씨 장원은 1998년 북경중화민족박물관에서 한족(漢族) 건축의 전형으로 지정하고 1 : 1 비율로 복제하여 베이징의 중화민족원(中華民族園)에 설치하도록 결정하였답니다.

그리고 강씨 장원은 현재 섬서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고요.

이런 사연을 가진 강씨 장원이 내 눈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진즉 포기한 것을 약 올리기나 하는 것처럼 양가구 혁명 구지가 12Km 남았다는 안내판이 서 있네요.

안 가기로 했다는데 왜 그러는 건데...



아무튼 성루식이라는 표현대로 강씨 장원은 골짜기 앞을 성으로 막아 작은 성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제법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장원 광장에는 동네 사람들이 하는 작은 간이식당이 있는데, 나보다 먼저 온 노인네들이 벌써 구경을 끝내고 거기서 냉편(冷片)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맛있어 보여서 나도 구경을 다하고 먹고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나오자마자 시내버스가 오는 바람에 그만 맛보는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아쉬운 장면이었서요.

일본의 성처럼 입구는 바로 문과 통하지 않고 일단 ㄱ자로 꺾이며 올라가도록 되어 있군요.

이거야 성 만드는 기술의 기본이지요.

오르는 계단 바로 옆에는 동굴 집이 파여 있습니다.



물론 강씨 장원 왼편에는 본격적(?)인 동굴 집들이 많이 있고요.

강요조가 서슬 퍼럴 때는 파지 못했을 테고, 힘 빠진 홍군 시절에 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입장료를 받지 않네요.

이게 웬일이래?

그런데 일단 계단을 올라가니 꽃을 한창 피운 아카시아가 만든 그늘이 있고, 장원을 들어가는 문 앞에 한 처자가 서있네요.

입장료 내놓으라고.

그러면 그렇지.

괜히 좋아했네요.





그건 그렇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를 보면, 황토 고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주변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진 골이 보이고 평지는 농지로 쓰이는.

이제부터는 강씨 장원을 제대로 구경을 해보지요.

우선 강씨 장원 성벽에는 강요조가 직접 썼다는 글이 있습니다.



대악병번(大岳屛藩)이라고 되어 있군요.

‘큰 산이 병풍처럼 울타리를 치고 있다’

대충 이런 뜻인가요?

안은 일단 넓은 공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툭 터진 곳도 없고 구불거리고 좁고 동굴처럼 연결부를 만들어 놓아서 누가 침입을 해도 방어하기 좋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많이 갑갑하지요.

하지만 나름대로 이렇게 만든 이유는 있겠지요.



경사 계단은 배수까지 신경을 써서 물이 한꺼번에 몰려 내려가지 않도록 돌을 세워서 붙여 놓았네요.



건물 안도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관리 상태가 허름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꼼꼼하게 처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웬만한 것은 모두 돌이라지요?




우물을 깊게 팠는지, 물을 길어 올리는 시설이 별도로 있군요.







원래 건물 벽의 색이 황토색이었는지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문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조각해서 장식한 것을 보면 우리 강 선생 눈썰미가 대단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더군요.




마구간도 있고 또 우물도 있습니다.

크게 보면 3단 구조로 되어 있네요.

제일 꼭대기 층에 가면 동굴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여기 살던 사람들이 거주하던 공간인 듯합니다.

제일 안쪽이자 맨 꼭대기 동굴 집은 세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나 보더군요.

할머니 한 분이 햇볕 쬐기를 하다가 나를 보더니 나가라고 손짓을 하네요.

할머니 왜 그러셔.

나 돈 주고 들어 온 사람이에요.





아무리 명불허전이어도 나는 이런 풍경이 더 좋습니다.


입장권에 나와 있는 강씨 장원 그림을 얻었을 장원 위 언덕으로 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역시 오르면 시야가 넓어지지요.



길은 언덕에 뚫은 굴을 지나 어디론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골짜기 너머에는 동굴 집과 황토 언덕이 보이고요.





사이사이 계단을 이룬 밭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 작물을 심어 먹고 살았을 법하네요.

이 동네 사는 사람 모두들 참 험한 땅 거친 곳에서 산다는 느낌이.



입장권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곳에 서서 강씨 장원을 사진에 담습니다.

사실 크기로 보면 중국 평야 지대에 부자들이 만든 무슨 대원에 비하면 화장실 규모겠지요.

우리나라 경복궁을 보고나서 중국 자금성 화장실만도 못하다는 소리들도 하잖아요.

하지만 그들이 부를 이룬 땅과 이곳은 절대 같지 않지요.

시절을 잘못(?) 만난 탓에 홍군을 만나서 자기가 가진 것 모두 빼앗겼겠지만, 이런 거친 땅에 부를 일군 강요조 조부 이하 3대는 나름 인정해 줄 것이 많아 보입니다.

단순히 현재 지주이고 부자이기 때문에 소작 농민의 적이고 몰수 대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많이 억울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지금 중국에서 부자들을 보면 그 때 부자가 된 환경보다도 더 쉽게 더 착취해서 부를 이룬 사람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다들 시절을 잘 만나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강씨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바로 아래에는 이렇게 동굴집이 아직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깔끔한 것을 보면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네요.

그 앞에는 창고 같은 건물도 보이고요.

전체적으로 보면 사람의 숨결이 그친 강씨 장원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사람들이 자기 거주지로 삼아 삶을 이어가는 터전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을 구경하다가 만난 두 아가씨들은 멀리 광서성에서 왔다더군요.

참 먼 곳에서 왔다고 했더니 정말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여기서 더 먼 것 같아도 사실 지도에서 보면 광서성이 더 멉니다.





강씨 장원 구경을 마치고 이 아가씨들과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이들은 가현에 간다고 삼거리에서 내립니다.

이 삼거리에서 미지에서 가현 가는 버스를 타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라서 영어를 좀 할까 기대를 했는데, ‘온리 차이니스’


중국 시골 여행을 하려면 중국말을 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한자라도 읽고 쓸 수 있던지 그게 아니면 무지 힘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