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 승리 기념비가 있는 곳은 승리산(勝利山)입니다.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제법 가야 되는데, 종점이 승리산 입구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 시내버스비는 5 각(角)입니다.
모택동은 장정이 끝났다고 선언한 곳에서, 이 동네에선 아직 원이 아닌 각이라는 돈 단위 시대가 끝났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있군요.
싸면 좋기는 한데, 사실 1원 내고 5각짜리 거슬러 받으면 귀찮기만 합니다.
이 동네야 올 때 다시 써먹으면 되기는 하겠네요.
하긴 더한 일이 오기 터미널 화장실에서 있었습니다.
화장실에서 화장 고칠 일이 급해 들어가려고 하니 돈을 내라고 하더군요.
1원 정도 하나 하고 1원을 내고 들어가려 하니 이게 뭡니까?
1 각이었습니다.
5각짜리 하나에 1각짜리 4장, 해서 모두 5장을 주더군요.
어휴~
이거 왜 이러셔...
그냥 1원으로 하자고.
그거 받아 봐야 주머니 속에서 귀찮게만 한다고.
아무튼 공공요금은 오기만한 곳이 없을 것 같습디다.
아직 시내버스 요금을 5각 받고 화장실 요금 1각 받는 곳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엄청난 크기의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는 종점에 내리면 멀리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산이 장정 승리 기념탑이 있는 승리산이 되겠습니다.
다른 곳은 대개 평지였는데, 오늘은 등산을 제대로 하게 생겼더군요.
입구쪽으로는 뭔가 시설물을 만들고 있었는데, 장정 기념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승리산, 그 이름도 거창한.
거대한 입구 앞에 섭니다.
위에는 왕 별 셋, 아래는 별이 다섯 개.
무엇을 뜻할까요?
그리고 기를 죽이는 계단이 하늘로 이어지는 것처럼 놓여 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양쪽으로 장정을 상징하는 구조물들이 죽 서있는데, 장정에 나서는 아들을 보내는 어머니와 가족의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누가 더 가슴이 아팠을까요?
자식을 보내는 어머니라고요?
아닐 것입니다.
이들이 떠나면 해방구였던 곳은 장개석 군대가 몰려 와서 초토화 시킬 것이고 홍군 가족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겠죠.
장정에 나서는 아들은 남겨진 가족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뻔히 알았을 텐데 그것을 알고도 남겨 놓고 가야하는 심정이 오죽했을까요?
장정에 나설 때 모든 병사가 함께 간 것은 아닙니다.
떠나가는 장정 부대가 있었고, 꼬리 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정강산 현지에 남은 부상자로 편성된 부대가 있었지요..
이쪽편이나 저쪽편이나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장정에 나선 부대도 거의 기적과 같은 업적을 이루어내지만, 잔류 부대도 이에 못지않은 큰일을 해냅니다.
뒤에 남겨진 병사들을 지휘한 지도자는 진의(陳毅)입니다,
이 사람은 장정이 진행되면서 계속 뒤에 남겨지는 부상자와 낙오자들을 모아서 큰 부대를 만드는데 이 부대가 나중 신사군(新四軍)으로 팔로군과 더불어 홍군 주력이 되지요.
그야말로 상상하기 힘든 괴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정말 혁명 정신에 불타는 사람들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런 사연들이 하늘로 오르는 계단에 시작 단계부터 장정을 마치는 시기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당연히 시작은 10월 10일 서금(瑞金)을 출발할 때입니다.
다음은 자투리 부대 대장 진의와 작별.
아마 이들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서로 기대를 안 했을 겁니다.
그게 1934년 10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935년 10월 19일 이곳 오기에서 모택동은 장정이 승리로 끝났다고 선언을 하게 되는 것인데, 거의 일 년 동안 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상강 전투에서 박살이 나고, 준의에서 모택동이 지도자로 선출이 되고 그 다음 성동격서의 게릴라 전법으로 허를 파고들어 이곳 섬서성 오기에 이들이 오기까지 정말 각본없는 드라마가 펼쳐졌죠.
물론 과장법이 많이 첨가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지난 행적을 보면 그게 설사 과장이 섞였다 해도 엄청난 일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산 중턱에는 장정 승리 기념탑이 있습니다.
그냥 뽈대 스타일이라서 크게 볼거리는 아닌데요, 사실 볼거리는 그 옆으로 이어지는 산길에 있습니다.
서진에서 시작하는 장정.
그 처음은 돌 판에 새겨진 부조입니다.
그 중 일부.
동료의 죽음 앞에 산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네요.
이들은 이런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을 것이겠죠?
본격적으로 산길에 오르면 제일 먼저 만나는 상이 바로 이 동상입니다.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장정에 나선 누나 상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제4방면군으로 참전한 아버지를 따라나선 딸 등수영(邓秀英)입니다.
사천(四川)성 통강(通江)현 신장(新場)향의 농민 등심과(鄧心科)는 1932년 홍군 제4방면군으로 참전합니다.
그러다가 장국도의 제4방면군은 1935년 장정에 나섭니다.
(모택동의 홍군과는 다른 경로 다른 시기였습니다)
이때 13살이었던 등수영은 여섯살짜리 남동생 등옥건(鄧玉乾)을 업고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장정을 따라 나섭니다.
장정 도중에 아버지는 병사했고, 엄마와 이들 남매는 장족 지역에 남겨졌습니다.
이들 가족은 토비(?)들에게 붙잡혀 뿔뿔이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 후 남동생 등옥건은 일하던 곳에서 도망을 칩니다.
그는 어느 절에 들어가 염색 일을 하면서 살다가 결국 누나를 찾게 되는데.
1952년 아바 장족 지역이 해방군에 의해 해방될 때 누나는 해방군을 위한 장족 현지어 통역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남동생은 지역 인민공사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그 후 1963년 남매는 엄마와 함께 고향인 사천성 통강현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연입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인가요?
전쟁이라는 상황은 힘없는 백성들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요.
그러니 아무리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하잖아요.
산길을 따라 동상은 이어집니다.
하나하나 장정 중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만든 것이라더군요.
아무튼 이 동상을 따라 오르면 정상입니다.
발 아래로 오기 시가지가 펼쳐집니다.
요즘 중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그럭저럭 등산을 하면서 구경을 마치고 승리산을 내려옵니다.
여기도 모택동의 흔적이.
시내버스를 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모택동이 거주했다는 곳 안내판이 있네요.
하긴 여기라고 모택동이 살던 집이 없을 리가 없지요.
다리가 천근만근이지만 안 가볼 수가 없어서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
거주지를 찾아서 가보는데, 있을 만한 곳인데 없네요.
노인네에게 모주석 거주지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모택동을 통 못 알아듣습니다.
마오쩌퉁, 몰라.
마오처뚱, 몰라.
결국 써주니 대문이 닫혀있는 곳을 알려 줍니다.
닫혀 있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니 집이 수리중입니다.
연안이나 지단에 있던 모택동 거주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합니다.
이런 정도면 모택동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을 것 같네요.
시내버스를 타려다 좀 걸어야 되기에 택시를 잡아타는데, 이 동네는 합승이 기본인가 봅니다.
호텔로 돌아옵니다만, 발이 너무 아파서 마사지를 한 판 받기로 합니다.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문 교회가 있고 그 옆에 안마 가게가 있네요.
교회에 관계있는 사람이 안마사인 듯.
저녁은 먹으러 나가기 귀찮아 과자로 그냥 때웁니다.
흑, 불쌍타.
오늘의 지출
아침 (죽 + 만두) 7원
나라시 택시 30원
호텔 100원
점심 13원
마사지 120원
버스 0.5원
택시 5원
과자 3원
물 2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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