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 파땅은 대략 1,600 m가 넘는 제법 높은 산이지만 정상 턱 밑까지 차로 오를 수 있어 싱겁기가 그지 없습니다.
아무튼 짧은 정상 놀이를 마치고 내려 오는데, 전보다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가만 보니 동네 별 체육대회가 열리는 듯.
그건 그렇고 점심을 어디서 먹고 가야 되겠기에, 장소를 물색해 보는데.
집에서 김밥을 준비해 와서 간단한 국수집이면 좋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국수집이 널렸더군요.
난장이 열려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덕 쪽으로 뭔가가 있더군요.
뭔가 중국 분위기가 나는.
가 봅니다.
제 3군 31 지휘부.
아, 거기가 여기군요.
문 양 옆에는 '아버지와 형 세대는 가족을 세우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로 목욕을 했다', '행복을 얻은 후대는 왕의 은덕을 잊지 말지어다'라는 문귀가.
피로 목욕을 했다.
참으로 처절한 말이네요.
지휘부 옛터로 오르는 계단 양 옆으로는 왼편에 태국 국기가 오른 편 옆에는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가 꽂혀 있었습니다.
청천백일기.
참 오랜만에 봅니다.
청천백일기는 장개석이 중국 대륙을 석권했을 때의 상징입니다.
그 뒤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한 다음은 대만 정부의 공식 명칭인 중화민국의 상징으로 쪼글어듭니다.
유엔에서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퇴출되고는 청천백일기는 대외적으로는 같이 퇴출되었고 간신히 대만에서나 볼 수 있는 국기가 되었습니다.
중화민국이란 국호도 더 이상 대외적으로는 사용을 못하게 되었죠.
기껏해야 차이니스 타이페이나 타이완 정도가 그들의 호칭인데.
그 청천백일기가 여기에?
사실 이 곳의 중국인들과 청천백일기로 상징되는 장개석의 국민당과는 관계가 있지만 현재의 대만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그 사연을 정리해 보면 이럿습니다.
1949년 말, 그 때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내전이 마무리를 향해 가던 시점이었습니다.
패배를 목전에 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하자, 운남성 주둔 국민당 부대들은 국경을 넘어 버마로 후퇴를 합니다.
항복 아니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버마로 밀려난 국민당 부대는 한국 전쟁 발발 후 전선을 분산시키려는 전략을 세운 미국 CIA와 대만의 협조로 중국 운남성을 재침공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이 당시 국민당군은 버마의 샨 주를 장악하고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마약 매매에 손대기 시작합니다.
물론 미국 CIA의 강력한 후원이 있었습니다.
원래 국민당군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은 양귀비 재배에 알맞은 기후와 토양 조건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산악 지대의 소수 민족들에게 강압적으로 양귀비를 재배시키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세금으로 거두기 시작합니다.
또한 사병들을 소수 민족 여자들과 결혼시켜 양귀비 재배와 신병 모집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했고요.
이들은 각지에서 거둬들인 생아편을 나귀를 이용해 타이로 운반하고, 타이의 제2도시인 치앙마이에서 군수품이나 식량, 의류 등으로 교환했습니다.
그러다가 국민당 잔류 부대는 1961년 중국 해방군과 버마군 합동 작전에 의해 버마 샨 주에서 밀려 타이와 라오스 산악 지대로 쫓겨 나게 됩니다.
라오스로 흘러간 잔류 부대는 라오스 정규군으로 흡수가 되지만, 태국으로 들어 온 잔류 부대는 그 당시 세력을 키우던 쿤사 마약왕의 조직을 견제하는 도구로 태국에 이용당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많은 인원이 대만으로 철수를 하지만 잔류를 원했던 세력은 그대로 남았죠.
이 때 장개석의 대만 정부는 잔류 세력과는 모든 관계를 단절합니다.
어느 국가에든 소속이 없는 무국자가 되어 버린 것이죠.
아무튼 그것이 도이 매쌀롱을 근거지로 한 단희문 장군의 제 8군과 나중에 도이 파땅을 근거지로 하는 이원환 장군의 제 3군입니다.
쿤사를 견제하는 목적이 달성되자 두 부대는 라오스 국경 쪽에 살던 몽족(태국에서는 메오라고 함) 진압, 즉 빨갱이로 덧씌워진 레드 메오 소통전에 투입이 되고, 그 다음은 말레이시아 국경 쪽의 태국 공산당 토벌과 패차분의 공산당 토벌에 동원 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룹니다.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들 손에 들려진 것은 태국 시민권입니다.
중국 본토에서는 도망자였고 대만 정부에게도 버림 받아 무국적자가 된 이들에게는 귀한 선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나라에서, 남의 전쟁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우들의 핏값으로 받은 대가였죠.
물론 지도부는 마약 거래로 인해 엄청난 부의 소유자가 되었지만요.
반공주의자라는 알량한 칭찬 아닌 칭찬에 목숨을 걸었던 국민당 잔류 부대원들, 현 중국에는 무시 당하고 대만 정부에는 외면 당하며 산 이들이 도이 앙캉, 도이 파땅, 도이 매쌀롱등 태국 북부 매홍손, 치앙마이, 치앙라이 주 북부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중국계 태국인입니다.
흔히 '국제 마약 시장의 원흉'이라는 꼬리표를 단 KMT(국민당)으로 불리는 역사의 희생자들입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트럭이나 밴을 타고 사람들이 계속 모여 듭니다.
입고 있는 옷 색깔도 다르고 쓰여 있는 동네도 다릅니다.
한 팀은 미사락 부녀회라고 쓰여 있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미사락은 도이 매싸롱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죠.
도이 매싸롱에서 왔냐니까 그렇답니다.
여기서 도이 매싸롱은 꽤 먼데.
오늘은 바로 그 날이네요.
적어도 치앙라이에 흩어져 사는 국민당 잔류 세력의 후손들이 모두 모여 체육대회를 하는 날.
매년 파땅에서 3월 29일에 열린다는군요.
마침 우리가 바로 이 날 여기에 온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미리 왔는지 언덕 위에 텐트를 치고 그 앞에서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과거가 어찌 되었던 이들은 이제 태국 시민입니다.
하지만 그 뿌리는 잊지 않으려 애쓰는.
역사의 수레 바퀴에 치어 굴곡의 삶의 살아야만 했던 이들의 조상도 얼마 있으면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에 의해 토벌의 대상이 되었던 몽족이나 태국 공산당들도 옛날의 아픔은 잊겠죠.
그러길 바랍니다.
남은 후손들은 모두들 행복한 삶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도이 파땅을 내려 왔습니다.
푸치파는 단순한 지형 기념물이라면 도이 파땅은 거기에 살던 사람들의 아픔이 새겨진 땅이더군요.
특히 몽족에게는 더욱.
그러고 보면 몽족의 고난도 참 잊기 어렵습니다.
베트남에서와 라오스에서의 몽족은 미군에 이용 당하고 전쟁 뒤 수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고, 중국의 몽족(묘족)은 인민해방군에 의해 토비로 찍혀 수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태국에서도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희생되었고.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어디에도 기록이 남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라 없는 민족은 여러 가지로 불쌍합니다.
참, 혹시 파는 국수가 중국계 후손이 만든 것이니 중국 맛이 날까 했더니, 태국 쌀국수 맛이었습니다.
이처럼 중국의 모습은 겉으로만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벌써 4월의 첫날이네요.
우리나라는 나날이 봄이 짙어 갈 텐데.
여기는 그 날이 그 날입니다.
'태국 치앙라이 정착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앙라이] 화장실의 태국어 (0) | 2017.04.03 |
---|---|
[치앙라이] 축복 아니면 불태움(Blessing or Blazing) (0) | 2017.04.02 |
[치앙라이] 나들이 데이 3. 도이 파땅(Doi Phatang) 전망대 (0) | 2017.03.31 |
[치앙라이] 나들이 데이 1. 도이 파땅(Doi Phatang) 가는 길. (0) | 2017.03.29 |
[치앙라이] 카페 넘버 에잇(NUMBER EI8GT) (0) | 2017.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