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치앙라이 정착 2019

[치앙라이] 2월 넷째 주일 예배

정안군 2019. 2. 24. 17:49

 

 

 

 

 

 

닥터 브릭스 - 헌신한 하나님의 종(Dr. Briggs - A Self Sacrificing Servant of God)

 

설교자 : 닥터 씨랏 뿌쑤린캄(Dr. Sirirat Pusurinkham) 목사

 

마태복음 28 : 19 - 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매일 시장에서 음식을 구걸하던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음식 조금을 받아 걸망에 넣은 뒤 일어 서다가 그 앞에 서 있는 왕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왕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두려움에 떨며 거지는 걸망을 뒤져 쌀 한톨을 꺼내 왕에게 건내자, 왕은 그것을 받고는 고맙다고 하고 가버렸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의 걸망에서 모든 것을 꺼내고는 쌀 한톨만한 크기의 금 알갱이를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 금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알고는 왕에게 그의 걸망에 있던 모든 것을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답례로 더 많은 금 덩어리를 받았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그 거지와 같아서 하나님께 한 가지 또 한 가지 원하지만 누군가와 무언가를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생활과 끝없는 복을 주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더구나 우리를 낳아주시고 돌봐 주시고 최고로 좋은 것을 주시며 최선으로 가르쳐 주신 우리 부모님과 같이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신 많은 사람들은 언급조차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계속 도와 주기를 기대하고는 다른 사람과 그 복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2019년 2월 24일 오늘, 우리는 치앙라이에 복음을 가져다 주려 자신의 삶을 헌신한 한 선교사인 하나님의 종을 기억하려 합니다.

이 사람은 닥터 윌리암 브릭스입니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는 또한 52세의 젊은 나이로 캐나다에서 죽었습니다.

오늘은 그의 소천 100주년을 기립니다.

이번에 치앙라이 교회들은 그가 치앙라이 사람들에게 베푼 사역과 헌신에 감사를 표하며 이 지방이 이토록 번영하게 발전을 가져 온 분에게 영광을 돌리려 함께 하였습니다.

 

덕터 브릭스는 1867년 3월 1일 캐나다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 뉴욕의 의과 대학을 졸업한 다음 그는 태국(당시는 씨암)에 의사이자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 시절, 현대 의술과 의료법이 태국에 도입되지 않아 창궐한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은 많은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1890년 람빵에서 의사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10년 뒤 치앙라이로 옮겨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합니다.

거기서 그는 1918년까지 총 18년간 주님과 지역민들을 섬겼습니다.

 

닥터 브릭스의 업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까요?

 

1. 그는 온 맘과 정성으로 주를 사랑했습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은 그가 믿음과 같은 것에서 특별한 자격을 지녀야 함을 의미합니다.

주를 향한 닥터 브릭스의 믿음은 굳건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체험을 하였고 그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복잡한 문제와 그 당시 오지였던 북부 태국 지방에서 봉사하던 중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러하였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오버브룩 병원의 입안자였고 9년 동안 치앙라이 제일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이 교회의 첫 예배당이 1914년 세워지기 전) 그는 오버브룩 병원의 본관에서 주일 예배와 기도 모임 그리고 성경 학습 모임을 주관하였습니다.

치앙라이 위타야콤 스태프와 학생들과 복음을 나누면서 그는 학교의 교수 학습 능력 배양을 위해 쉼없이 노력을 하였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설교에서 흔들림없는 결단력을 표현하던 열렬한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모토인 자기 희생을 강조하며 예수의 십자가는 자기 희생의 전형이며 이 덕은 하나님의 종이 진지하게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훈련시켜 치앙라이의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이동 클리닉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가방 안의 의약품 중에는 말라리아를 치료할 때 사용되는 키니네가 있었습니다.

닥터 브릭스의 치료와 선교 사역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고 많은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2. 닥터 브릭스는 그의 가족을 사랑했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자신의 아내를 좋아하였고 존중하였습니다.

그는 언젠가 아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기술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기증과 함께 내 아내 안나벨 브릭스도 많은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녀는 이 예배당 건축의 주 기획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녀는 우리의 다섯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밴쿠버에 있었기 때문에 주춧돌을 놓는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녀를 말해야 합니다.

아내의 헌신과 후원, 동의나 허락이 없었으면 이 교회의 건축은 분명히 시작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닥터 브릭스는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의 어머니의 아들이었습니다.

1914년 11월 5일에 부친 그의 편지에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이 편지와 함께 이 교회의 사진을 같이 보냅니다.

벽 위의 짚 지붕은 비와 해에서 일꾼들을 보호합니다.

각각의 문과 창문 위의 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식한 지역 일꾼과 풋내기 선교사에 의한 좋은 작품이지 않습니까?

나는 어머니가 이 예배당의 공사가 끝나면 예배당을 좋아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도우시고 복주십니다!’

 

덧붙여 닥터 브릭스는 애정 깊은 아버지였습니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아내와 자녀를 캐나다에 돌려 보내고 치앙라이에는 혼자 머물렀습니다.

뒤에 그는 첫째 아들 알버터 브릭스가 유럽에서 전사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비극은 닥터 브릭스를 슬픔과 번민에 빠지게 합니다.

만성 위궤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는 자신과 환자를 치료합니다.

안식년이 돌아 왔을 때 그는 치료를 받기 위해 모국으로 돌아가 그의 가족과 시간을 함께합니다.

1919년, 그의 아들 알버트의 죽음 뒤 일 년, 닥터 브릭스는 소천을 하였고 그의 아들과 함께 묻히게 됩니다.

 

3. 닥터 브릭스는 치앙라이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그의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치앙라이 사람들을 위해 수 많은 희생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 35절의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이 무엇과 같은지 그의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예수의 복음을 나눈 것과 함께 그는 치앙라이 사람들이 영원히 감사해야 할 많고 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의사 이외에 닥터 브릭스는 치과를 운영하였고 틀니도 만들었습니다.

오버브룩 교회에서 재정 후원을 얻어 오버브룩 병원의 건축과 구급차와 의료 기기 구입을 하였습니다.

치앙라이 도시 계획을 하였고 치앙라이 지역의 모든 도로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중 하나가 씽하끌라이 도로 모퉁이부터 도이 통 기슭까지 매꼭을 따라 가는 도로로, 그를 기려 닥터 블릭스 도로로 명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매꼭 강가 산 위에 위치한 치앙라이 육군 막사의 기초 공사를 도왔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열렬한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치앙라이와 인근 지역에 새 교회를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교육의 질을 높이는데도 헌신을 하였습니다.

치앙라이 남자 학교(현 치앙라이 위타야콤)의 건축을 위해 많은 땅을 샀습니다.

닥터 브릭스가 1919년 2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학교는 그를 기려 ‘브릭스 기념 학교’라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농업 개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치앙라이에서 오렌지와 커피 그리고 딸기 시험 재배를 하였습니다.

해외에서 젖소를 들여 와 현지 소와 교배를 하여 지역민과 병원에 신선한 우유를 공급받도록 하였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휴식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테니스 코트를 만들었고 사진사로서 그의 집 지하실에 암실을 만들어 사진 실력을 높으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노래를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노래하고 하모니카를 연주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지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곤 했습니다.

 

언젠가 아쓰당 왕자가 러시아 공주의 치앙라이를 방문에 동행을 하였는데 둘 다 코끼리를 타고 도착을 하였습니다.

닥터 브릭스는 학생들을 모아 그들을 환영하였습니다.

깃발을 흔들며 환영 노래를 하였는데, 이 노래는 후에 치앙라이 위타야콤 학교의 교가가 되었습니다.

 

오버브륵 병원의 건축 중에 닥터 브릭스는 한 명 당 160밧을 주고 몇 명의 노예를 사서 병원 공사에 이들을 고용하였습니다.

닥터 브릭스가 도운 다른 건축물들은 치앙라이 제일교회 1914 성전,구 시청 본관, 주지사 공관 등이 있습니다.

또 닥터 브릭스는 치앙라이를 약탈하려고 버마에서 온 200명의 샨 병사들에게 대항하도록 치앙라이 사람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요약하면 닥터 브릭스의 삶은 치앙라이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가족 그리고 치앙라이 사람들을 위해 그의 사랑을 보이는 특별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기심없는 나눔으로 그는 치앙라이를 엄청나게 발전을 시켰습니다.

그는 받는 자보다는 주는 자였습니다.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예수의 사랑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분이 자신과 그가 사랑했던 치앙라이 사람들에게 한 헌신을 기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닥터 브릭스 소천 100주년을 기념합니다.

치앙라이 사람들을 대신하여 우리는 그의 특별한 삶과 귀한 공헌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모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 봅시다.

이 지역이 더 번영하고 평화스럽고 아름다워지도록 주고 나누고 손 잡기를 배웁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