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충주 이야기

금봉산 석종사와 창룡사에 가 보니.

정안군 2011. 10. 4. 13:37

 

가을빛이 아주 좋은 어느 날 석종사와 청룡사를 찾아가보기로 한다.

 

석종사와 청룡사는 충주의 진산인 남산(금봉산)이 품고 있는 절이다.

 

실제 가서 보니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절만 좋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도 좋은 절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제까지 나는 괴산 각연사 신도(?)였는데, 이 방문을 한 뒤 청룡사 신도를 하기로 했다.

 

아니 신도라면 너무 거창하니까 명예 신도(?)로 하자.

 

또 이 방문으로 이 두 절과 관아공원에 얽힌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으니.

 

자료를 모아 설명을 해보면 좀 지루하겠지만 이렇다.

 

충주 관아공원(官衙公園)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터에 조성한 공원이다. 중앙공원이라고도 부르며, 면적은 약 7,500㎡이다. 조선시대 충주읍성 내에 있던 충주목(忠州牧) 관아 터에 조성한 공원으로, 청녕헌(淸寧軒)과 제금당(製錦堂) 등 옛 관아 건물이 남아 있다. 이 관아 건물들은 1870년(고종 7)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중건한 것이다. 그 후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8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충주시에서 완전 해체하여 복원한 후 그 일대를 공원으로 꾸몄다.

 

관아공원에는 청녕헌과 제금당 외에 충청감영문과 산고수청각, 축성사적비, 순교자현양비 등이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수목과 어우러져 있어 고색창연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석종사(釋宗寺)

 

석종사는 충주시내 외곽 금봉산(金鳳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말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넘게 대찰로서 이름났던 절이었으나, 조선중기 억불정책 때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절을 헐어 충주읍성과 관아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창룡사(蒼龍寺)

 

충주의 진산인 남산 기슭에 자리한 천년 고찰로, 신라 문무왕 때 고승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중건하여 충주의 대찰로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절의 역사는 충청북도 사지에 전해지는「창룡사관음상연기문(蒼龍寺觀音像緣起文-1730년)」,「충청북도충주군남변면금봉산창룡사중건후불준병기(忠淸北道忠州郡南邊面錦鳳山蒼龍寺重建後佛準竝記-1913년)」등의 기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위의 기록을 종합하여 조선후기와 근대 창룡사의 연혁을 정리하면, 1729년에 절에서 시주를 모아 1730년에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당시 대웅전ㆍ요사 등 수많은 전각들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70년(고종 7)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옛 세무서 터에 군사시설인 수비청(守備廳)을 세우기 위해 법당을 헐어 버림으로써, 절의 사세는 크게 축소되어 요사 한 채에 원불 한 구만 남은 아담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창룡사는 충주에서 가장 큰 사찰로 전각은 물론 전각 내 수많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주 법당이 폐쇄됨으로써 전각 안에 봉안된 여러 불상들이 충주시내 사찰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창룡사는 거의 폐사가 된 것이다.

 

조병로((趙秉老)

 

1849년(철종 1년) 음관으로 출사하여 동몽교관을 시작으로 보성군수, 합천군수, 공주판관, 밀양부사를 역임하였다.

1867년 충주 목사가 되어 사창(社倉)을 마련하기 위해 각 면에 토교(土窖)를 건조하게 하고, 이듬해 충주읍성을 개축하여 1869년 완성되자 당시 충청감사 민치상이 축성 사실을 조정에 알려 포상하게 했다. 이때의 축성 사적비가 충주 중앙공원 안에 있다. 또 임진왜란 이후 헐어진 충주관아를 신축했고, 1870년 충주읍지를 개편하였다.

(중략)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에 충주목사 재직 중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목사조공병로영세불망비(牧使趙公秉老永世不忘碑)가 세워졌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충주관아공원과 석종사 그리고 창룡사는 어떤 인물이 어떤 일을 두고 벌인 사건에 공통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다.

 

그것은 조병로(趙秉老)라는 인물로 엮인 사연인데, 위 사건을 정리해 보면 그는 석종사와 창룡사의 사찰 건물을 헐어 그것으로 충주 관아를 중축했다는 것이다. 그가 한 일은 국가 차원으로 보면 상을 받을 일이었고 실제로 그랬단다. 불교계에서 보면 남의 재산을 그냥 뽑아간 아주 나쁜 놈일 텐데, 모든 세상 모든 일이 이렇게 양면성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석종사는 남산 임도가 끝나는 부근에 있어, 몇 번 그 앞을 지나가긴 했어도 안에 들어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생각보다 규모가 컸으며 꽤 느낌도 좋았다.

 

석종사 옆에 있는 창룡사는 비교적 오래된 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석종사는 요즘 돈 많은 사람이 벌린 신사업(?)이라고 생각을 해 왔는데, 나름대로 둘 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석종사는 요즘 들어 신축한 건물이다 보니 뭔가 신흥 재벌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창룡사는 일주문조차 제대로 갖추질 못했지만 단아한 분위기가 나에게는 훨씬 좋았다.

 

그래서 석종사 신도가 아니라 창룡사 신도를 하기로 한 것이다.

 

불교에 대한 깊이가 부족하여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으니 그냥 그 잘 찍은 사진만 나열할란다.

 

즐겁게 감상하시길.

 

우선 석종사가 나갑니다. 

 

 

 

 

 

 

 

 

 

 

 

 

 

 

 

 

 

 

 

 

 

 

 

 

 

 

 

 

 

 

 

이어서 창룡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