얜디는 지금 초등학생입니다.
얜디 아빠와 엄마는 미얀마 소수 민족 출신으로 어찌 어찌 해서 태국으로 흘러 왔고 또 어찌 어찌 해서 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빚을 지었을 겁니다.
그게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험한(?) 일이거든요.
우리 부부는 얜디를 한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센터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얜디 아빠는 미얀마에 살 때부터 기독교 신자였기에 아빠와 얜디만 일요일 예배에 나왔고 엄마는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오는 빈도 수가 조금씩 늘기는 했지만 그저 인사 치례 정도였죠.
막일 하며 어렵게 살던 부부는 센터 안의 교회 신자가 되면서 계기를 맞습니다.
센터 선교사가 한 한국 식당을 소개시켜 준 것이죠.
워낙 성실했던 얜디 아빠, 엄마는 그 식당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많이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식당 주인 부부가 워낙 살갑기도 하고 잘 보살펴 주었기도 하였고.
하지만 다 좋을 수는 없죠.
얜디 동생 '남'이랑 얜디는 아빠 엄마가 식당에서 일할 때 따로 보살펴 줄 사람이 없어 매일 식당에 같이 출근해 하루종일 식당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이 식당에서 지내게 하는 일이 얜디 부모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별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죠.
그러던 중 식당은 치앙라이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옮겨갑니다.
얜디네 집은 뽕파밧 온천 뒷쪽인데 집에서 꽤 먼 거리입니다.
거기도 온 식구가 함께 다녀야 하는데, 그게 오토바이로는 불가능해집니다.
아이들도 크고 거리가 멀어서죠.
할 수 없이 좀 무리해서 픽업 트럭을 삽니다.
차는 고구려 시대 쯤 출고된 것처럼 보이는 고물 중 상 고물인데 그래도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얜디는 나만 보면 그 차를 자랑하곤 했지요.
그러던 중 우리는 센터 교회를 나와 치앙라이 교회에 출석하였고 식당도 거리가 멀어져 아무래도 자주 그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식당에 가면 부부 그리고 얜디가 얼마나 반가워 하던지.
특히 얜디는 더 유별 났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내가 얜디네를 뽕파밧 온천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서 노점을 한다며.
왠 노점?
만나서 사연을 들어 보니 식당 일이 너무 많아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 해서 그만 두었다고.
사연은 이해가 가지만 노점 꼴을 보니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았어요.
늦게 들어 온 탓에 자리는 주차장 초입.
그리고 먼저 들어 온 노점들이 다루는 품목은 겹치기로 하지는 못 하는 듯 해요.
자기들만의 상도겠죠.
그러니 내놓은 물건도 뭐 사 줄만한 것도 거의 없었어요.
온천에 매일 가는데 얜디네를 그냥 지나가긴 좀 뭐하고.
만만한 게 코코넛 밖에 없었어요.
그냥 지나치기도 미안하고 또 억지로 뭘 사기도 그렇고.
민망한 시간이었어요.
하루 매상이 얼마 되지 않아 보여 그냥 여기서 가까운 다른 한국 식당이라도 가는게 더 낫지 않겠냐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지켜 보기로 했습니다.
수입면에서 도저히 않 될 것 같으면 그 때 가서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의외로 잘 버티네요.
아침 여유 있게 나와서 저녁이면 가게를 접고 집에 가니 일단은 우리나라 정치인 누군가가 말한 '저녁이 있는 삶'은 실현 되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가요?
얜디와 얜디 동생 남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오전은 학교에 있다가 오후에는 온천에서 놉니다.
남이도 깽이 시절에는 꽤 험하게 놀았는데 얼굴도 많이 예뻐지고 아가씨 티가 많이 납니다.
어느덧 유치원에 다닌다네요.
물론 얜디도 이제 컸다고 나에게 더 이상 안기거나 뽀뽀해 달라고 해도 절대 안 하네요.
이제 아가씨 티가 많이 납니다.
가게는 늘 한산해서 손님이 있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성수기라서 오는 사람이 제법 있는데, 혹서기나 우기로 접어 들면 온천은 사람 구경하기 힘들게 됩니다.
어찌 살거나?
그렇게 배운 우리는 늘 그렇게 살지 않는 이 나라 사람들을 걱정합니다.
변화가 있었네요.
지난 주.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삼일 연휴라서 일요일은 온천에 사람이 미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얜디네 가게는 문을 닫았습니다.
주일이라서 문을 닫았을까?
물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얜디 엄마에게서 힌트를 얻습니다.
가게를 지킬 때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 성서를 읽더군요.
얜디 엄마도 이제 신실한 신자가 되었나 봅니다.
처음 얜디네가 집을 짓고 입주할 때 예배를 드리러 갔던 한 목사님이 집 안 구석에 차려진 신상을 보고 얜디 엄마의 허락도 없이 치운 일이 있었어요.
그게 얜디 엄마를 속 상하게 해서 한 동안 교회 근처도 안 왔었거든요.
그 때 나는 얜디 아빠가 아내와 두 딸에게 잘 하는 사람이라서 엄마도 언젠가 변할 텐데 너무 얜디 엄마를 무시한 행동이 아닐까 염려를 했었습니다.
사실 무례한 행동이지요.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동안 집에 변화가 있었고 그 무언가가 얜디 엄마를 변하게 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얜디 가정을 보면 사실 그들 나름대로 잘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인 정서로는 좀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얜디를 어떻게 더 도울 수는 없을까?
시내에 있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게 하면 어떨까.
그러나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여기 얼마나 더 있게 될지도 모르고, 그 얘가 제대로 대학 정도는 마칠 때까지 보살펴 줄 끈기와 여유가 있을까.
얜디를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이 더 많아집니다.
어찌하는 게 좋을까나.
사실 우리는 여기 선교사로 파송되어 온 것이 아니고 좀 여유있게 살고 싶어 온 것이라 여러 면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주변에 알게 되는 도움이 필요할만한 태국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말이죠.
돕고 싶어도 다른 이유도 있지만 제일 큰 장벽은 내가 가지고 있는 젓가락도 짧다는 점이죠.
하긴 이런 것은 아마도 한국인들이 가지는 오지랍인지도 모릅니다만.
오늘도 온천에 가면 동생 남을 데리고 노는 얜디를 만나게 될 겁니다.
볼 때마다 내가 그 아이에게 더 해 줄 것이 많은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매일 듭니다.
이럴 때는 이슬람의 사고 방식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저 '인샬라'하면 되니까.
그러나 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전승을 가진 기독교 신자라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고...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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