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 2022

[이즈미르] 원 스미르나(Smyrna) - 스미르나가 시작된 곳

정안군 2022. 6. 6. 16:49

2020년 10월 30일 그리스 사모스 섬 해역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이른바 에게해 지진이었다.

지진 규모에 비해 피해가 상당했는데 11월 4일 기준으로 114명 사망, 1035명 부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모두 이즈미르에서 발생한 피해인데 해안 근처인 바이라크르(Bayrakli)라는 지역에 집중되었다고.

어제 이 동네에서 쌍둥이 레지던스라고 부르는 Folkart Tower에 모임이 있어서 갔다가 지진에 대하여 여기 사시는 회장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전혀 몰랐고 관심이 없었던 이야기이다.

이런 것은 대단한 소식이었을 텐데 역시 남 나라 이야기라서 그때는 관심이 없다가 근처 이야기가 되니 그제서 끌리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런 이야기 중에 지진 피해가 있었던 동네가 바로 이곳이고 그래서 거의 재개발처럼 동네가 바뀌었는데 그중 Folkart가 현저히 눈이 띤다고.

현재 이 동네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레지던스 공사는 다 이 회사가 작품이다.

그렇담 이 회사 뒤에 누가 있을까?

터키가 독재국가라면 답은 뻔할 뻔자다.

그러다가 스미르나 최초의 도시는 아고라 자리가 아니라 폴카르트 타워가 있는 곳에서 두 정류장 거리에 있다는 말이 나왔다.

갑자기 지진에서 옛날 도시로 관심이 전환.

이런 때는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는 것이 최고이다.

있었다.

 

오늘은 최고 온도가 34도로 예상한 날.

이런 날은 아침에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나도 당연히 안다.

자 그럼 옛 도시 여기 말로 에스키 스미르나(Eski Smyrna)를 찾아 가보자.

 

일단 이즈반으로 바이라크르(Bayrakli)역까지 가면 그다음은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다.

역에서 나오면 상가가 이어지는데 좀 소박한 분위기인 걸 보면 이 주변은 서민들이 사는 동네 같다.

똑바른 길 끝에는 딱 봐도 유물이 있는 곳인 듯한 분위기의 언덕이 등장한다.

너무 소박한 곳이라서 입장료도 없고 거창한 출입구도 없다.

 

입구 한 구석에 흉상이 하나 있는데 잘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나라도 관심을 갖고 봐 드려야지.

누구신가?

에크렘 아쿠르갈(EKREM AKURGAL)이라는 분인데 고고학자로 이곳을 발굴할 때 주역인 붐이셨나 보다.

전의 유물은 서양 각국의 전유물이었는데 요즘은 터키(아니 이제부터 투르키에로 이제 불러야 함) 학자들이 주도하는가 보다.

그렇다고 하고 관리나 좀 잘하지.

흉상이나 안내판이나 이게 뭐여.

 

이곳을 스미르나 바이라크르 언덕 유적이라고 부르나 보다.

안내판에는 어디에 뭐가 있다고 안내가 되어 있지만 그걸 읽기보다는 우선 구경하겠다고 발이 먼저 나서더라.

 

바이라크르 언덕 유적은 아직 발굴 중인데 발굴된 곳은 대략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건 기원전 3세기의 모습이란다.

기원전 3 세기면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그때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3000년쯤 뒤에 멀리 동쪽 끝의 땅에서 한 사람이 찾아와 구경할지 알았을까?

 

주택지는 거의 기초 부분만 남아 있다.

이것도 사실 땅 속에서 발굴한 것이다.

 

그나마 이곳에서 나온 것 중 인물이 제일 나은 물건인 듯.

신상 받침이었을까 아님 제단이었을까?

 

자 이제 기원전 3000년 사람이 되어 골목길을 걸어 보다.

아마 호메로스도 걸었을 수도 있다.

아니 걸었을 것이다.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를 구상하면서 이 골목을 이리저리 배회하였을 수도 있지.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그리고 예쁜 각시나 잘 생긴 신랑을 만나 살다가 병들어 죽었을 것이다.

볼 것이 없다고 입장료도 없지만 우리나라 폐사지처럼 머릿속에 그때의 장면을 그리면 어지간한 유적이 있는 곳보다 훨씬 더 머릿속은 풍성해진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머릿속으로 상상하게 되니 말이다.

 

구덩이를 파 놓은 곳이 있었는데 기원전 1050년에서 330년에 걸쳐 무려 10개의 주거지 층이 있단다.

그러니까 제일 깊은 곳은 기원전 1050년 주거지 그리고 맨 위가 330년 주거지.

기원전 330년이라면 뭔가 감이 잡히는 세월이지만 1050년이라면 그때 산 사람들은 누구였나?

하기는 지구 역사에 비하면 그 세월도 아주 찰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골목길에서 놀던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맨 위 부분이 기원전 330년 경이면 그다음은 어떤 이유로든 지금 아고라가 있는 곳으로 옮겨 갔을 것인데 그 이유가 지진이었을 수도 있겠다.

이 동네는 워낙 지진이 흔한 곳이니.

 

기원전 7세기 후반의 주택지였는데 모양을 보면 2층 구조란다.

아마도 헬리니즘 시대 최초의 2층 건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구조물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보나마다 신전이었겠지.

 

아테나 신전이었네.

년도가 분명한 걸 보면 어디 기록에 남았나 보다.

기원전 725 - 546년.

아테나 신전.

 

그런데 기둥들을 보면 머릿돌은 뭔가 오래된 느낌이 오는데 기둥은 좀 뭔가 느낌이 오질 않는다.

요즘 만든 신품이 아닐까 싶은.

 

기둥보다 옆에 있던 올리브 나무가 더 오래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올리브는 내가 덕을 보려고 싶은 나무가 아니라 후손들이 덕을 보라고 심는 나무란다.

 

유적이 있는 터는 제법 넓었다.

아마도 도시는 역이 있는 쪽으로 더 있었을 것이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니 이곳만 발굴 조사를 하기로 했을 텐데도 꽤 넓다.

이곳이 꽤 흥미가 있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실제 벌였던 일들과 관련된 유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곳은 성 밖인데 로마인들이 성스러운 장소로 삼아 제물을 드렸던 제단이 있던 곳이란다.

 

기원전 6세기 초반에 사용된 화장터.

성과 성 사이 공간에서 화장을 하였던 모양이다.

 

제1, 제2, 제3선의 성벽 흔적이 뚜렷하다.

그냥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제대로 공들여 쌓은 성이었다.

 

고대 샘터 유적이다.

며칠 전 다녀온 체쉬메라는 동네 이름이 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동네도 샘이 많아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단다.

샘 유적이 터키어로 안틱 체쉬메.

물은 여전히 잘 나오고 있다.

한 번 샘은 영원한 샘인가?

 

네크로폴리스.

성벽 앞에 있는 작은 네크로폴리스는 페르시아 침략 전 있었던 전쟁에서 죽은 귀족들의 무덤이 있었다고 안내판에 쓰여있다.

기원전 7세기 말에서 6세기 중반에 걸쳐서 사용되었단다.

 

이 석관들이 그 귀족들의 장례에 사용된 것인가 보다.

장식이 없이 소박한 것을 보니 검소했던지 돈이 없었던지 둘 중 하나였겠지.

 

돌로 쌓은 성벽 안쪽에는 흙벽돌로 쌓은 성벽 흔적이 있었다.

성의 규모가 점점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또 성의 재력도 그만큼 커진 것일 수도 있고.

 

무려 기원전 9세기 때의 흙벽돌로 쌓은 성벽 유적이란다.

 

이제 어지간한 구경은 끝난 듯싶으니 이제 나가세.

아직 발굴을 기다리는 터는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올리브나무 밭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쉽게 땅을 파는 발굴 조사를 할 수 있었고.

 

출구 근처에 있는 고즈넉한 집 풍경.

기원전 몇 백 년을 들먹이는 곳이라서 집도 기원전 풍경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유적지 근처 로터리에는 저렇게 기둥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

누구 말로는 저게 항구였다는 표시란다.

저 기둥에 배를 묶어 놓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질 않는다네.

딱 보니 아테나 신전 기둥들과 닮은꼴이니 그곳에서 혼자 스카우트되어 저기 서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아무튼 엉겁결에 원 시미르나 유적 구경을 잘하였다.

느낌은 유홍준 교수가 좋아한다는 폐사지 딱 그것이었다.

빈 터의 미학.

비어 있어서 그 나머지는 머리로 상상하게 만드는.

이곳의 시간이 지금으로부터 4000년을 넘어간다면 또 그런 곳을 거닌다 생각을 해 보면 그 무게가 가벼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