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충주 이야기

충주 관아공원 그 단아함에 대하여

정안군 2011. 10. 21. 14:14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8도로 개편할 때 충주에 감영이 설치되었다.

감영은 관찰사가 집무하던 곳이니 지금으로 하면 도청 소재지 쯤 되시겄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후 피해가 컸던 충주에서 공주로 감영이 옮겨지게 된다.

이 문은 잘 나가던 때의 충청감영문을 재건한 것.

문 앞을 지키는 포교와 포졸은 모형이다.

 

 

충주목사 조병로가 충주읍성을 개축하고 세운 기념비이다.

꼴 값하느냐고 망한 지 오래된 명나라 연호 숭정을 쓰고 있었다.

죽어도 오랑캐 나라 청의 연호는 쓸 수 없다는 알량한 자존심.

불쌍하다.

그렇게 오랑캐가 싫으면 나라를 튼튼하게 하여 망국의 백성이 되지 말았어야지.

오랑캐라고 깔보던 청국에게 져서 속국이 된 주제에.

 

 

 

뒷면에는 좌수, 수교, 호장, 이방 등 지방 아전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옛 주춧돌인가 보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렇게 따로 논다.

 

 

5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

외과 수술을 거쳐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그래도 그 기상이 장하다.

마치 충주관아공원의 상징처럼.

 

 

조선 말 목사가 주재하던 이 터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했나 보다.

충주 마지막재는 단양이나 수산 청풍 고을에 살던 죄인들이 충주목으로 끌려 올 때 넘던 고개인데, 이 고개를 넘으면 이제 마지막이라 하여 마지막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다.

이 신자들도 그 마지막재를 넘었을까?

 

 

지킬 가치가 있다고 믿은 그 믿음 대신 자기 생명을 버린 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충주목사가 집무하던 동헌 청령헌이다.

이 건물이 바로 충주목사 조병로가 석종사를 헐어 옮겨 지었다는 그 문제의 건물.

 

 

사또 영감과 그 아랫 사람들이 정사를 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

물론 모두 모형들이다.

 

 

청령헌의 뒷태

 

 

 

마침 충주에 현대판 충주목사를 뽑는 선거가 있어 한 후보자의 선거 운동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영빈관 역할을 하던 제금당이다.

 

 

처마 부분을 잘 보면 절에서 쓰는 장식이 보인다.

 

 

제금당(製堂 )

 

 

산고수청각() 건물로 부엌으로 썼던 건물이다.

 

 

충주문화회관과 연결되는 문이다.

고목이 옛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 참고 자료

 

목(牧)은 큰 도()와 중요한 곳에 두었는데, 왕실과 관계가 있는 지방은 작더라도 목으로 승격시켰다.

 

목사(牧使)는 신라 때의 군주()와 그 직위가 같으며, 보통 병권()을 가졌다.

 

고려 때는 전국 12목에 목사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에 3명, 충청도에 4명, 경상도에 3명, 전라도에 4명, 황해도에 2명, 강원도에 1명, 함경도에 1명, 평안도에 2명 등 모두 20명의 목사를 두었다. 

 

 

충주관아공원은 중앙공원이라고도 부르며, 면적은 약 7,500㎡이다.

 

조선시대 충주읍성 내에 있던 충주목() 관아터에 조성한 공원으로, 청녕헌()과 제금당() 등 옛 관아건물이 남아 있다.

 

이 관아건물들은 1870년(고종 7)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한 것이다.

 

그 후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8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충주시에서 완전 해체하여 복원한 후 그 일대를 공원으로 꾸몄다.

관아공원에는 청녕헌과 제금당 외에 충청감영문과 산고수청각, 축성사적비, 순교자현양비 등이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수목과 어우러져 있어 고색창연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2층 누각 형식의 관아공원 정문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이며, 정면에 충청감영문(), 뒷면에 중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충주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 건물인 청녕헌(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6호)은 정면 7칸·측면 4칸의 목조와가 팔작지붕 건물로, 공포와 화반 등의 장식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청녕헌 동쪽으로는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던 별관건물인 제금당(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7호)이 있는데, 이 건물은 정면 7칸·측면 3칸 규모로 예성별관()이라고도 한다.

 

공원에 있는 또 하나의 문화재는 축성사적비(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8호)로, 1869년(고종 6) 충주목사 조병로가 충주읍성을 개축하여 완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석비이다.

 

공원에는 그밖에 관아에서 찬간() 즉 부엌 용도로 썼던 산고수청각() 건물과 신유박해·병인박해 때 순교한 충주의 천주교 신자들을 기리기 위한 순교자현양비가 있다.

충주시는 2007년 2월부터 7월까지 사업비 2억 8,000만 원을 투여하여 청령헌 기단부 원형을 복원하고 미관상 어울리지 않던 경계석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와 주목을 식재하고 바닥 전체를 황토로 포장하는 공원 정비 사업을 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