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염에서 만난 의외의 건물은 바로 이거.
태국 일본 우호 기념관(Thai Japan Friendship Memorial Hall)입니다.
태국과 일본 사이의 우호라.
여기를 알면 태국의 극진한 일본 사랑의 수수께끼가 풀릴까요?
기념관 앞에 가니 관리인인 듯한 사람이 막 문을 닫고 나가려고 합니다.
대충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들어 가자고 하니 자기는 일이 있어서 나가야 된다네요.
결과적으로 보니 입장료가 굳었더군요.
정원이 있고 기념관이 있는데, 정원은 자유롭게 공짜로 둘러 볼 수 있지만 기념관 안에 들어 가려면 200밧이란 거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게 웃기는 게 외국인 요금은 영어와 아라비아 숫자로, 태국인을 위한 요금은 태국어와 태국 고유 숫자로 써 놓았어요.
태국인은 단 돈 20밧.
태국어를 아니 이런 꼼수가 보입니다.
다행히 관리인이 출타하는 바람에 그런 꼼수는 피할 수가 있었어요.
기념관은 건물도 깔끔하고 정원도 꽤 보기 좋게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 구석에는 '전우여 편히 잠드소서'라고 쓰여 있는 위령비와 여기서 죽은 병사를 기리는 시가 쓰인 판이 있었습니다.
또 탑이 서 있고 주위에는 여러 나라가 국기와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더군요.
중국도 있고 심지어 만주국도 있었는데, 우리 나라는 없었어요.
여기 태국 오지에 우호 기념관이 설립된 이유는 건물 앞에서 알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대로 번역을 해 보지요.
우정과 추억 이야기
서기 1941년 12월 21일 태국은 일본과 일태공수동맹조약을 맺고, 1942년 1월 3일 일태 공동 작전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태국은 동년 1월 25일 영국,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다.
가타무라 시하치 중위가 이끈 일본군 제 15부대는 베트남 사이공에 본거지를 둔 남방사령부의 지휘하에 태국, 미얀마 국경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일본군 병사와 쿤염 주민과의 우정은 일본군이 미얀마와의 전투를 위해 도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병사들은 캠프를 설치하고 중위를 포함한 복수의 일본군 병사는 주민의 집에 체류했다.
일본군은 마을의 병자를 일본군 병원에서 치료해 주면서 일본군과 쿤염 주민의 우정은 마치 형제처럼 깊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 후반으로 접어 들면서 많은 일본군 병사가 전투에 나가 부상을 입고 목숨을 잃었다.
왓 뭐이 떠(뭐이 떠 사원)에는 야전 병원이 설립되어 일본군 병사를 치료했고, 시체는 사원의 서편에 매장했다. 현재 그 장소에는 쿤염 경기장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살아 남은 일본군과 퇴역군인회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하여 석비에 이름을 새겨 왓 뭐이 떠, 훼이 뽕, 수린지구, 매홍손군에 봉납했다.
글쎄요.
모든 게 그렇 듯 모든 게 나쁘지만은 않았겠죠.
하지만 전쟁이라는 게 이기고 있을 때와 지고 있을 때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죠.
힘에 밀려 일본의 우호국이 되어야 했던 태국과 태국인의 비애.
이들이 써 놓은 문장 속에는 이런 것들은 없습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이쪽은 인도 임팔 쪽으로 가는 지름길이더군요.
길을 빌리자던 풍신수길의 요청을 거부해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
마찬가지로 길을 빌리자던 일본의 요청에 응해 길을 열어 주었던 태국.
그 뒤 태국 내의 길을 따라 당시 영국령이었던 미얀마에 침공을 하고 또 임팔까지 가려 했던 일본군.
이러나 저러나 일본 때문에 그들이 지나간 길 옆의 백성들은 고통이 따랐던 건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호라.
정원 뒷쪽으로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트럭 '도락꾸' 잔해가 몇 개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어통과 자동차 휠.
영국이나 미국 같은 그 당시 최강 국가들과 한 판 겨뤘던 일본.
물론 참담히 깨졌지만, 그 당시 그들의 기술력은 대단했다고 할 수 밖에 없네요.
그러나 저러나 친일파 하나 정리하지 못하고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 가는 역사의 왜곡 속에 우리 나라에도 임진왜란 때 왜성이 서 있던 마을에 일본 조선 우호 친선 기념비나 기념관을 세우자고 할 인간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일본군 장교 애비를 둔 박마담이나 딴나라 대표인지 뭐시기는 그 집안 내력이 대단하던데, 그러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나라 꼬라지 참.
옛날에는 일본놈 앞잡이, 지금은 미국놈 앞잡이.
조선말 이완용이를 보면 그런 인간들이 다 그렇죠.
러시아 앞잡이였다가 일본 앞잡이로.
남 나라 벽지에 서 있는 우호 기념관을 보니 여러 모로 찹찹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네요.
역사에서 배우는 게 없으면 그 역사가 반복된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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