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

[치앙라이] 태국에서의 데자뷰.

정안군 2016. 11. 11. 12:12



 

태국은 애도 분위기입니다.

곳곳에 검정과 흰색의 대비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죽음 뒤 거의 한 달이 지나서 사회 분위기는 처음 광적인 장면은 보이지 않고 좀 자숙하는 분위기 같네요.

 

모처럼 라차팟 대학 도서관에 들렸습니다.

로비에는 태국 왕에 대한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네요.

역시 검정과 흰색의 공간입니다.

 

초창기 검정 천이 동났다는 뉴스의 이유를 알 수 있겠네요.

이런 모습으로 전국을 검은 천으로 덮었으니.

 

이런 모습은 옛날 내 어려서 있었던 박정희 부인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 데자뷰 같습니다.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겼던.

 

그 때 나는 여의도 광장에 있었습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저녁이었네요.

엑스플로 74에 참석했던 그 때.

광장에서 벌어진 집회에 교회 친구들과 참석을 했었죠.

비가 와서 그 비를 다 맞고 있던 우리들에게 집회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비가 내리고 있으니 그냥 그 성령의 비를 맞으라는 사회자에게 욕을 한 바탕해 주면서 말이죠.

사실 단 위에 있던 빌리 그레함이라는 강사 목사도 단상을 가득 채웠던 목사들은 당연히 비 안 맞는 곳에 있으면서 있었어요. ㅠㅠ

 

그러다가 갑작스런 총격 소식에 사회자가 우리 육영수 여사가 병원에 실려 가서 수술 중에 있으니 살려 달라고 통성 기도하자고 했던 기억.

모두 엉엉 울면서 우리 여사 살려 달라고...

감정이 몹시 메말랐던(?) 나는 같이 기도했던 생각이 들지 않네요.

그리고 그 때는 이미 사망한지 오래 되었다는.

 

광장에서 한참을 떨고 난 뒤 마포대교를 건너 숙소로 돌아 와 체온 저하로 벌벌 떨며 잠을 청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우리를 지도하던 대학생 간사 형은 우리를 깨워 예배를 보려고 했는데, 같이 있던 장로님이 말려서 애들이 힘들어 하니 그냥 두라던 말이 어찌나 복음 같던지...

 

그 뒤.

장례식 때 마지막 운구차량에 손을 대고 서 있던 박정희.

청와대에 있던 박근혜, 박근영, 박지만 세 자녀들의 사진.

이게 그 시절의 기억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건 사건마다 의문도 많았지만 그 때는 의문을 말 할 시절도 분위기도 아니었답니다.

 

그리고 박정희도 죽고.

이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끝났게 아니었습니다.

다시 좀비처럼 살아나게 되지요.

 

박정희와 육영수 망령.

 

하긴 그 때 육영수 여사에 대한 애잔함이 오늘 벌어진 사단의 시초가 되었으니 아이러니네요.

 

나이 든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수퍼파워 박정희 신화 그리고 나이 든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육영수에 대한 애잔함.

 

이게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근원이지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대통령이 된 비극.

개인의 비극이라면 간단하겠지만, 나라의 비극으로 가고 있으니 이 또한 비극이군요.

 

신화와 애잔함을 이끌어 내, 박근혜를 대통령을 만든 쓰레기 찌라시.

이들이 박근혜 우상 허물기에 나서서 개 떼처럼 달려 드는 것을 보면 그저 욕만 나옵니다.

 

SOB.

 

사실 육영수 여사에 대한 애잔함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반인신, 즉 박은 인간이고 반은 신이라는 박정희.

그 우상화의 신화는 박근혜 사태를 지나면서 흐려질까요 아님...

하긴 세월이 지나면 그런 생각이 머리 속 깊게 박혀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점점 더 숫자가 줄어 들겠죠?

 

그러러면 조중동으로 이어지는 찌라시들의 힘을 느낄 수 없는 세월이 되어야겠죠.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조중동에 신뢰를 가지고 매일 보시는 분들에게 권합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 보시길.

 

적어도 경향신문이나 한겨례신문을 보시거나 인테넷 언론 오마이뉴스를 보시면 다른 세상의 보는 눈이 열리게 될 겁니다.

가끔씩 팝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들어 보시고.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늘 옳바른 것은 아니랍니다.

항상 새로운 현상을 느끼지 않으면 계속 낡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요즘 읽었던 한 책에서 어처구니 없었던 귀절을 보았습니다.

 

1973년 오일쇼크의 여파로 연탄파동이 났다.

그 해 겨울 "서울 사당동과 봉천동에 눈이 와서 산꼭대기에 있는 '달동네'에는 연탄 값을 3배나 더 받았다.

연탄 공장에서는 연탄을 내놓지 않았고, 석탄 공장을 가진 광산업자들은 아예 탄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부영 기자는 '연탄 품귀 현상이 일어나 달동네 서민들은 3배나 더 내고 쓴다'는 기사를 썼다가 기관에 끌려가서 '민중 봉기를 획책한다'며 죽도록 맞았다.

이런 사례는 말하자면 끝도 없다.

 

송건호 평전 중에서(p 152)

 

그 해 나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었습니다.

연말 쯤 되면 연례 행사처럼 있었던 일 가운데 하나였던 국군 장병 아저씨에게 위문 편지 써오기.

별 생각 없이 편지 써오라는 담임의 말에 편지를 써서 냈다가 갑자기 교무실에 불려 가서 귀싸대기를 맞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죄명요?

 

그 해 연료 부족으로 겨울 방학이 12월 초에 시작되게 되었는데, 그게 좋다고 편지에 썼다는 게 죄명이었습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방학 일찍 주는 게 그렇게 좋냐고...

 

이게 내가 겪은 박정희 시대였습니다.

 

아무튼 세월이 가면 우상은 무너집니다.

박정희에 대한 우상도, 이 동네 왕에 대한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