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고등학교.
입시 마지막 세대로 경기고에 들어 간 이들은 단순한 수재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들어 간 시골의 고등학교와는 모든 면에서 비교조차도 불가한 엄청난 학교였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성골과 육두품 정도 차이도 아니고 성골과 노비 정도?
경기고등학교는 소위 명문이라던 서울 5대 공립 중에서도 우두머리 학교였습니다.
그들이 경기고등학교에 들어 갈 때, 커트라인이 198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200점 만점에 198점.
198점이니까 두 개까지 틀리면 합격이 아니라 동점자도 있었을 테니 그야말로 다 맞던지 아님 하나 정도만 틀려야 들어 갔던 그런 학교입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보면 수재 중 수재도 빼어난 수재라야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바로 경기고였죠.
KS 마크라고 들어 보셨나요?
다들 아시겠지만 경기고(K)를 졸업하면 일단 앞 K자 하나를 받고요.
여기에 서울대(S)가 뒤따라야 폼나는 KS가 완성이 됩니다.
서울대.
들어가기 만만한 곳이 아니죠.
하지만 경기고등학교 학생들이 어디 보통 학생들입니까?
그 어렵다는 서울대학교를 경기고 학생들은 졸업생 반 이상이 들어 갔다네요.
어쨌든 경기고 졸업 후 이 서울대에 입학을 하면 KS 마크가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경기고에 서울대 출신이라고 다 확실한 KS가 아니었대요.
한 때 이 나라 주류, 메인 스트림이라고 스스로 자부했던 이들은 경기고에 서울법대 출신이어야 그야말로 성골이라고 했었죠.
그건 그렇고.
다시 경기고등학교로 이야기가 돌아 갑니다.
그 엄청난 학교에 일단 입학을 하기만 하면 앞 날이 모두에게 환했을까요?
사람 사는 세상, 특히 한국 같은 경쟁 사회에서 그럴리가요.
일단 그 엄청난 학교에 입학하긴 했어도, 내 기억으로는 그 해 입학 정원은 600명이 아니었나 싶은데, 여기도 다시 서열이 갈립니다.
어느 누구에게는 상상하기 싫은 악몽의 시작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시 시작된 일등부터 꼴찌라는 서열이 이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겠죠.
일등하는 학생도 그걸 유지하려면 엄청난 스트레스였겠지만, 모든 학교 재학 중 아마 최초로 꼴찌를 찍은 학생이나 꼴찌권 학생들은 그 충격이 엄청났을 겁니다.
중학교까지 압도적인 차로 일등만 하던 친구가 꼴찌라니.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잠깐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에서 학원 다닐 때 학원 강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경기고 일등과 똥통 학교 일등은 천지 차이이지만, 꼴찌는 똑 같다고.
실제로 그런지 몰라도 경기고에서도 예비고사에 떨어진 친구들이 있었다더군요.
그 때는 4년제 대학에 들어 가려면 지역 제한이 있는 예비고사를 일단 붙어야 했거든요.
수재 중 수재가 그깟 예비고사를 떨어졌겠나 싶지만, 꼴찌 충격에 자신을 포기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합니다.
1976년, 황 아무개는 동급생 중 반 이상이 갔다는 서울대에 낙방을 합니다.
후기도 다른 곳을 보았지만 낙방을 했는지 아니면 그냥 재수를 선택했는지는 확인이 안 됩니다.
꼽살이를 끼자면 나도 이 때 전, 후기 모두 낙방.
이 때 황 아무개와 동급생이던 이종걸과 고승덕은 서울법대에 진학을 해서 이 나라 주류라는 메인 스트림 계급에 진입을 하지요.
노회찬도 이력을 보니 서울대를 못 가고 고려대를 갔더군요.
그 당시는 아마도 상실감이 컸을 듯.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 졸업생이 서울대를 가지 못하면 창피해서 어디다 말도 못했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나중에 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보면 그 학벌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들의 산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참, 졸업 전 황 아무개가 벼슬을 한 게 있군요.
학도호국단 연대장이란 감투입니다.
연대장이라.
그 사연은 나와 같은 또래들은 다 알겁니다.
황 아무개와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5년.
그 해 4월에 흔히 말하는 월남이 패망합니다.
월남 패망.
물론 지금은 상황 판단이 다르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는 온통 충격에 빠졌었죠.
사실대로 말하면 빠진 척하고 독재 체재를 강화했죠.
이 나라 대장이던 박정희씨는 월남 패망을 핑계로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회를 군대 편제로 바꿉니다.
그래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도 갑자기 학생회장이 짤립니다.
학생회장이던 그 친구는 나와 같은 반이었는데, 갑자기 짤린 다음 학급으로 인사하러 다닌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학생회장도 학교에서 임명한 직책이라서 별다른 느낌은 없었어요.
그래도 그 친구는 학생 의견을 듣고는 그 당시 빡빡머리를 스포츠 머리로 해 달라고 건의도 하곤 해서 평판은 좋았었지요.
학생회장이 짤리던 때, 교련교사가 목소리 좋은 몇몇 학생을 운동장으로 데려가 구령을 부치게 합니다.
열중 쉬어.
차렷.
그렇게 몇 번 구령을 소리 높여 외치게 하곤 그 가운데 가장 구령 소리가 좋았던 친구가 연대장이 됩니다.
각 학년에서 또 대표를 뽑아 대대장을 시키고요.
아무튼 그 때 뽑힌 학생이 박 아무개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갑자기 벼슬 자리에 나가더니 그 뒤 인생 설정이 바뀐 듯 했죠.
대학 진학 후 학생훈련단 장교로 근무하고는 안기부인지 여기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목소리 좋아 연대장이 되긴 했는데 그 때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게 아닌지.
황 아무개도 목소리가 좋아서 연대장이 되었다고 동급생들이 기억하는 걸 보면 우리 학교 연대장 선정과 비슷했나 봅니다.
이게 팩트 같은데 사정을 봐주려고 해서인지 살짝 분발라 연대장이었는데 목소리가 좋았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러니까 연대장이라고 해 봐야 사실 별 게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니 이런 연대장 출신을 당시 동급생이었던 이종걸이나 노회찬이 우습게 알게 아니겠어요?
나도 그 때 연대장으로 뽑힌 친구를 우습게 알았으니.
하지만 남들은 뭐라 생각하든 내가 졸업한 학교 박 아무개처럼 황 아무개도 권력의 맛을 최초로 안 기회는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황 아무개는 나와 같은 해에 재수를 한 다음 1977년 성균관 대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그 당시 성균관 대학교는 후기였으니 전기에서 다시 서울대를 못 들어 간 듯 해요.
그때는 전기 서울법대나 고려대 법대, 떨어지면 후기 성균관대 법대, 전기 서울의대, 떨어지면 후기 카톨릭의대, 이런 식으로 진학을 하곤 했습니다.
입학하던 해, 1977년도는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계속되던 시기였습니다.
입학한 뒤, 어지간하면 취직은 보장되던 시기라서 나는 그야말로 놀자판 먹고 대학생으로, 그는 나름 범생이라서 고시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들어간 성균관 대학교도 나름 괜찮은 학교죠.
하지만 서울대를 못 가고 성균관 대학교에 진학을 한 자신에 대해 자괴감이 많이 컸을 듯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대학 3학년 때인 1977년 10월 26일.
그 날 박정희가 부하의 손에 의해 살해를 당합니다.
충격.
방송에서 속보로 나올 때 내 하숙생 친구는 추모의 의미로 먹던 아침식사를 멈췄는데, 나는 계속 먹습니다.
황 아무개는 그 날 그 속보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 날 이후 모든 학교는 한참 휴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때.
각 대학은 민주화 열기로 끓어 올랐죠.
그리고 517, 광주.
긴 휴교 끝에 다시 문을 연 대학은 전과는 달랐습니다.
꿈과 같았던 봄이 다시 사라진 것이죠.
비록 나는 소극적이지만 길로 나서서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쳤는데, 황 아무개는 그 때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기술고시 1차 합격, 2차 불합격.
그는 나와 다른 시험이지만 결과는 비슷했을 듯.
그리고 나는 포기하지만 그는 안 포기.
1981년 2월.
황 아무개와 나는 대학을 졸업합니다.
나는 바로 육군 신병으로 입대하여 군복무 생활로, 황 아무개는 사법 시험 합격 후 담마진으로 군대 면제의 길로.
공통 부분은 여기까지 입니다.
비슷한 듯 다른 인생을 살아 온 게 황 아무개와 나입니다
하지만 그 뒤 걸어 온 인생 방향은 많이 다릅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앞으로도 나는 내 길을, 그는 그의 길을 갈 겁니다.
누가 올바른 길을 간 것인지는 내가 믿고 그가 믿는다는 하나님이 나중에 판단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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