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치앙라이 정착 2017

[치앙라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정안군 2017. 3. 3. 13:45

 

 

일본 북쪽 섬 북해도.

일제 강점기 우리 조선 노동자들이 끌려가 그들의 목숨을 내 놓아야 했던 비운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 전에는 선 주민이었던 아이누 족이 자기 땅을 다 뺏기고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곳이기도 하고요.

 

북해도, 홋카이도.

높은 위도 탓에 겨울이 무척 길어 겨울 요정이 길게 활동하는 땅입니다.

 

짧은 여름에는 광활한 대지를 즐기려 오토바이 여행자와 자전거 여행자가 많이 찾는다고 하죠.

나도 북해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싶었는데, 아직은 그냥 꿈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혹 국립호텔에서 무상 급식 중인 별셋 부회장 이 아무개가 크게 뉘우쳐 어짜피 자기가 가지고 있지만 감당하지도 못할 돈을 온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하면 계획을 잡아 보고 싶습니다만...

 

아무튼.

요즘 한 TV 방송에 나온 '출발 일본 기차여행'을 즐겨 봅니다.

 

그 가운데 한 프로그램이 소야 봇선(혼센)을 소개하는 내용이었어요.

소야혼센.

북해도 중앙부쯤 위치한 아사히카와에서 최북단 도시 와카나이를 연결하는 철도의 노선입니다.

 

일본 철도 노선은 워낙 다양하기도 하고 각 노선마다 달리는 열차도 다르고 특색이 있어 일본 전국의 철도 노선을 섭력하는 걸 취미로 삼은 사람이 많다네요.

나도 해 보고 싶은데, 별셋 이 아무개가 회심하지 않는 한 기회는 없을 것 같아요.

일본의 교통비, 숙박비는 세계 최고이니.

 

아무튼 북해도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면 가 보고 싶은 곳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본 최북단인 소야 곶.

 

또 하나는 지금 양키스 투수로 활동하는 다나카 마사히로가 졸업한 고마자와 대학 부속 도마코마이 고등학교이 있는 도마코마이라는 동네입니다.

그 학교에서 새로운 다나카를 꿈꾸며 열심히 땀을 흘리는 고등학생 선수들을 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소야혼센을 보다가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됩니다.

 

시오카리.

시오카리는 조그만 마을인데, 사연은 대단하더군요.

시오카리 고개(도오게)

 

나가노 마사오라는 역무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고에 휩싸이는데, 자기 몸을 던져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건진 그런 청년입니다.

그 사연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미우라 아야코가 소설화합니다.

그 소설은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그 사연을 내가 정리하기는 너무 힘들어 다른 사람이 쓴 소감문을 옮길랍니다.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는 노부오로 등장합니다.

고개 이름도 시오카리가 아닌 시오토리로.

 

1909년 2월 28일, 역 근처의 시오카리 고개에 진입한 열차의 마지막 칸에 연결된 고리가 빠져, 열차는 사고 상황에 내던져진다.

그때 철도원이었던 나가노 마사오씨가 열차에 몸을 던져 객차에 깔림으로서, 객차의 폭주를 막아 사상자의 발생을 막고 자신은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시오카리역은 열지 않았으나, 현재 그 근처에 표창비와 시오카리 고개 기념관 및 문학비가 설치되어 있다.

사고 후 미우라 아야코에 의해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 '시오카리 고개'가 발표되고, 영화화 되면서 기념관과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중학교 때 '빙점'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저 흥미진진한 사건을 따라가며 재밌다고 느낀게 아닌가 싶다.

분명 지금 다시 빙점을 읽어보면 다른 감동을 받겠지.

미우라 아야코는 빙점의 작가로 일단 친숙하기도 했고, 교회에서 만난 국문학 전공 아이에게 강력 추천을 받기도 해서 제일 먼저 손에 들게 되었다.

일본소설을 마음껏 읽고 돌아가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자마자 장문의 추천 문자를 보내준 아이.

그 책들 중에서도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게 된 건 순전히 북오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보이지 않는 힘이 나에게 이 책을 열게끔 끌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책의 큰 줄기는 '노부오'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가이다.

명문가문에서 태어나 도련님이라 불리며 자란 소년이 여러 가지 아픈 경험과 또 설레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이를 먹는다.

마음 깊은곳에서 존경하고 있는 일생의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죽었다고 믿었던 어머니가 사실은 살아있고 아버지와 내통하며 여동생도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할머니에게 박해를 받아 쫓겨났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가 쫓겨났던 이유가 크리스트교 신자였단 사실에, 본능적으로 크리스트교에 대한 거부반응이 생긴다.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종교를 택했다는 것이 표를 내지 않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로 남는다.

또한 자신을 제외한 온가족 모두가 크리스트교 신자라는 사실이 자신만 소외되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지표이자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죽음이란 것은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임을 깨닫고 노부오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줄곧 죽음을 두려워하다가도, 성적인 욕구에 그것이 간단히 잊혀질 수도 있다는 것에 자신을 비하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의 내적인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일생의 친우뿐이다.

그리고 노부오는 그 친우의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는데....

 

주인공인 노부오는 반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는 남자다.

소년시절부터 그를 쭈욱 지켜봐왔기 때문에 -비록 소설속에서 그 자신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사실은 깊게 상처받았다는 것이 보인다.

시간순으로 나열된 사건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이유도 주인공이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겉모습은 그리 강해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 강한 심지를 지녔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절대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

신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고개를 숙일 줄 안다.

친우의 여동생은 선천적으로 다리를 저는 아이지만 그녀를 사랑한다고 자각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다리를 저는데 라는 문장은 아무데도 없다.

그저 자신이 동정과 사랑을 착각하는 것일까, 라는 방황을 잠깐 할 뿐이다.

오히려 그녀의 깨끗한 정신과 밝음에 비해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도련님이었던 노부오가 어른이 되고 사랑을 하고 어떻게 일생을 살았는지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했어도 나는 리뷰를 썼을 것이다.

곳곳에 들어있는 삶에 대한 문장들, 신에 대한 그의 생각들, 어린시절 겪었던 상처가 어떻게 극복되는지, 그저 한 사람의 일생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만한 소설이었다.

전철에서 내리기 싫을 정도로 한 문장 한 문장이 날 붙잡았었다.

스릴러나 미스테리처럼 흥미진진한 사건들 없이 정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만으로 이렇게까지 지루하지 않게 끌어내다니 정말 대단한 필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부오는 결국 소설의 후반부에서 크리스트교 신자가 된다.

어렸을 적부터 계기들은 끊임없이 있었지만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크리스트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병상에서도 슬퍼하는 표정을 짓거나 희망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말한 성경구절들, 그리고 어릴적 어머니가 말해주었던 신에 대한 이야기들, 과거 스쳐갔던 선교사의 말 한마디, 등등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그를 감화시킨다.

종교를 갖기 전부터 올곧은 성품이었던 노부오는 크리스트교 신자가 되어선 더욱 청량한 이미지의 청년으로 변화한다.

그가 결국 크리스트교 신자가 되었을 때는 그리 큰 감동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처음으로 성경책을 펼쳐들었을 때, 얼마나 대단한 이길래 그렇게 사람들이 따르는지를 직접 읽어보겠다는 마음으로 그가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가 나에겐 더 감동적이었다. 타국에 와서 살면서 즐거운 일만 100% 일어날 수는 없다.

전철 안에서 틈틈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위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노부오에게 반했고, 그 친우와의 우정에 반했고, 신의 사랑에 반했다.

 

그가 청년이 되기 전,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갑작스런 죽음이었음에도 유언은 제대로 전해질 수 있었다.

인간은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라며 항상 유언장을 써서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유언이지만 오히려 더 찡한 부분이 있었다.

노부오도 멋있었지만 그의 아버지야말로 진정 대단한 이였다.

도련님으로 기고만장하게 자랄 뻔 했던 노부오가 그토록 올곧은 길을 걸을 수 있던 것도 모두 아버지 때문이다.

그 이후로 노부오도 언제나 유언장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닌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그가 청년이 되기 전의 이야기로 그 이후로는 사랑과 종교에 관한 주제로 넘어가 자세히 언급되는 일이 없다.

유언장을 품에 넣고 다니는 남자. 이 문장 하나로 노부오의 성품이 설명되지 않나 싶다.

 

모든 사건들을 넘어서 그토록 기다리던 약혼식이 있는 날.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속에서 약혼녀는 결핵에 걸려서 몇년이나 자리를 보전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 불치병으로 알려진 결핵이 기적적으로 치유가 되기 시작하고, 그녀는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역으로 노부오를 맞이하러 가기로 약속을 한다.

얼마나 행복한 결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행복한 나날이 지속되더라도 이 소설은 일본의 소설이라는 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행복하면 할수록 불안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왜 이 이야기가 쓰여져야만 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삿포로의 험한 고갯길. 시오토리 고개.

약혼녀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 노부오.

그의 옆자리에는 항상 그의 올곧은 성품을 비꼬던 직장 동료가 타고 있다.

곡예를 하듯 고개를 넘어가던 기차가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후진하기 시작한다.

앞 기차와 연결되었던 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뒤에는 내리막길 뿐이고 이 기차는 곧 전복하여 절벽으로 떨어져내리거나 부서져내릴 운명이다.

사람들이 울부짖고 공포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역무원으로 역임한 노부오는 기차칸마다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동료에게 사람들을 진정시켜줄 것을 부탁하고 거꾸로 달리는 기차의 앞으로 달려간다.

핸들모양으로 생긴 브레이크를 온 힘을 싣어 돌린다.

기차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의 비명도 점점 줄어든다.

끝까지 브레이크를 돌리면 기차가 완전히 멈춘다는 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왠일인지 어느 지점에서 돌아가지가 않는다.

사무직이었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할 수가 없다.

고개가 심하게 꺾여지는 지점이 눈 앞에 다가온다.

속도를 줄였더라도 운전대를 잃은 기차는 고개를 돌지 못하고 그대로 절벽으로 떨어져내릴 것이다.

잠시 뒤를 돌아 객차 안을 본 노부오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동료와 눈을 마주친다.

무언의 말이 오고간다.

그리고 노부오는 망설임없이 선로로 뛰어든다.

그의 몸을 밟고 지나가며 기차는 속도가 줄었고 험한 고개가 꺾어지기 직전에 멈추었다.

 

사망 1명, 그리고 승객은 모두 부상없이 살아남았다.

 

1909년, 삿포로 시오카리고개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고다.

차라리 눈물을 흘렸더라면 마음은 시원해졌을 지도 모르지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뻐근해져도 눈물은 흐르지 않더라.

작가 후기에서야 이것이 실화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저 소설 속의 주인공이던 노부오가 실제 인물이었다는 무게감이 그제서야 쿵하고 왔다.

너무도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라서 일본 사람들은 왠만하면 다 알고 있단다.

이 사고로 많은 사람들의 그의 희생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특히 크리스트교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지고, 교회를 찾는 이들이 급수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지금도 고개의 정상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으나,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유언장은 건질 수가 있었다.

피에 흠뻑 젖었지만 다행히도 글씨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를 그토록 비꼬고 비난하던 동료는 그 사건 이후로 새사람이 되었다.

 

리뷰를 쓰다보니 다시 울컥한다.

읽은 지 한달이 되었는데도 노부오의 존재가 아직도 가슴을 찌른다.

차라리 실화라는 것을 알고 읽었더라면 충격은 덜했을 수도 있다.

그저 한 사람에 대한 일생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실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기에 100% 그가 살아온 삶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소년시절부터 지켜봐온 그의 일생이 스쳐지나가면서 더욱 애절해진다.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말을 감히 붙여도 될까.

크리스트교로 들어오게 되었고, 역무원으로 취직하게 되었고, 하필이면 그 기차를 타게 되었다.

그 과정이 순간적으로 이뤄졌다기보다 어렸을적부터 하나씩 퍼즐처럼 껴맞춰졌다.

 

마음 속 깊이 그를 존경한다.

어쩌면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았더라도 그는 자신을 희생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그토록 거부했던 종교를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희생적인 죽음을 스스로 택했다.

그것이 나를 울컥하게 한다.

 

쓰다보니 굉장히 길어졌다.

나는 미우라 아야코의 필력이 없으므로 엄청 지루해졌을 듯 하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기독교 성향의 소설이라고 편견을 가진 이들이 출판을 피해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그저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청년이 있었다고, 누군가는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요한복음 12장 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