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피분송크람(Pibul Songgram)인데, 어떤 분의 치앙라이 살이에 대한 글을 읽고 이 인물의 관저가 치앙라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기심 천국인 내가 모르는 곳이 아직 있었네?
구글에서 위치를 확인해 찾아가 봅니다.
구글에는 Field Mashal. P. PibulSonggram House라고 나와 있어요.
왓프라캐우, 왓도이응암므앙 그리고 왓프라탓도이통 등 유수한 전통을 가진 절들이 밀집해 있는 곳인데, 시가지 시계탑에서 북서쪽이 되겠습니다.
습지와 평지가 많은 치앙라이에서 비교적 고지대 언덕 위가 되겠네요.
관저를 소개하기 전에 이 피분송크람에 대해 알아 보죠.
이 사람은 1897년 7월 14일 타이 방콕 근처에서 출생하여 1964년 6월 12일 일본 도쿄에서 죽었습니다.
육군 원수와 총리(1938~44, 1948~57)를 지냈으며, 타이에 권위주의적 군사정부를 수립해 현존하는 군사 쿠데타와 군사 정권의 시조가 된 사람으로 박정희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일본을 좋아한 것도 그렇고.
평을 인터넷에서 불러 왔습니다.
정치인은 그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경우가 많다.
정치의 본질이 유한한 자원을 나눠갖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특정 정치인으로 인하여 누군가는 보다 많은 이익을 보았고, 그 반대 급부만큼의 손해를 본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는 매우 빈번한 군부 쿠테타인데, 그 시발점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오늘 소개할 육군원수 피분송크람이다.
피분송크람은 젊은 나이에 군에 입문하여 고속승진을 했고, 프랑스군에 위탁교육을 받으면서 국제정세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1932년, 그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한 쿠데타를 주도했다.
그러나, 그는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대리인들을 내세운 다음 막후실력자로 군림하다가, 1938년이 되어서야 이윽고 총리직에 올랐다.
피분송크람은 태국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수 많은 정책들을 추진했는데, 우선 국호를 시암(Siam)에서 태국(Thailand)로 바꾼 것이 그것이다.
국가의 정체성에 있어서 중세적 이미지를 벗어나 세속적인 근대국가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포장했지만, 실상 피분송크람은 당시 태국경제를 주름잡던 화교를 탄압하고 시암족 중심으로 정계와 재계를 재편하려 했으며, 또한 국호변경은 다분히 왕정복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피분송크람은 Cultural Mandates란 정책을 시행하여, 수 백년간 지속되어 온 태국의 전통복식과 생활양식을 서구적 형태로 바꾸었다.
정설은 아니지만, 그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집권 초기부터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구체적인 개혁의 내용도 메이지유신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역마다 특색이 있는 전통의복을 금지하고 제복착용을 의무화 해 통제와 복종의식을 심어주고, 자국민과 외국인을 명확히 구분지어 국민국가의식을 고양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남자는 아침에 출근하기 전, 아내의 볼에 키스를 하라던지 저녁에는 일찍 귀가하여 정원도 가꾸고, 샤워를 한 다음에 가족친지들과 저녁을 함께 먹고, 애완동물도 기르며 주말에는 반드시 1시간 이상 운동을 하고 잠은 6~8시간만 잘 것이며, 하루 4끼 이상 먹지 말라는 등 다소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또한 다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내용들도 있었다.
군부독재 치하였기 때문에, 정책이행은 생각보다 수월했고, 태국사회는 (특히 도시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피분송크람은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조국근대화론을 앞세워 국민들을 통제했고, 유럽에서 발발한 2차대전의 틈을 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지금의 캄보디아와 라오스) 일부를 무력점령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따 태국의 새로운 주(州)로 편입했다.
뿐만아니라, 괴뢰 만주국 수립 후 중국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한 제국주의 일본과 군사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버마로 전선을 확대할 수 있었으며 피분송크람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과 함께 피분송크람의 정권도 붕괴되었다.
영국은 태국을 일본과 같은 패전국으로 분류하였고, 그에 따른 배상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태국정부는 피분송크람의 정권은 비헌법적이었기 때문에 태국은 2차대전 기간 동안에 모든 행위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했고, 태국민의 본심은 연합국측에 있었다는 괴변을 늘어놓으면서 종전 당시 태국에 남아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손바닥을 뒤집은 태국군으로 인하여 일본군은 크게 반발했으며, 자신들은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니, (태국군이 아니라)연합국 소속의 군대가 자신들을 무장해제 해 달라고 요청했다.
꺼삐딴 리, 이인국 박사보다도 더 드라마틱했던 이 장면은 참으로 실소를 낳게했을 것이다.
영국은 태국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되갚기 위해서, 상당한 금액의 배상금과 관련 전범의 처벌을 준비했지만, 결국 결정권은 미국에게 있었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은 영국을 달래면서 태국을 다시 지렛대로 활용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태국은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국으로부터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받게 된다.
잠시 태국을 떠나 일본으로 망명했었던 피분송크람은 귀국 후, 다시 총리에 올라 태국을 '친미국가'로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했던 그는 또다른 쿠데타에 밀려나 다시 일본을 도망쳐야 했고, 결국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출처: https://frontline24.tistory.com/18 [Frontline24]
그를 알게 되면 파란만장한 태국 현대사가 보입니다.
태국 사람들은 본래 왕족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최근에 만들어 진 것 하며, 그들이 자랑하는 식민지를 겪지 않았던 것 또한 허구임을 알게 되죠.
아무튼 언덕 위에 자리한 공관은 고즈녁한 분위기입니다.
산책 삼아 와도 괜찮겠더이다.
건물은 독일 분위기도 나고 태국 분위기도 나는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런 정도면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입구는 The 37’th Army 이런 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아마도 37군 사령관 공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에 소장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은 마네킹이 있는 곳을 보니 소장 시절 피분송크람이 한 때 이 37군 사령관을 지낸 듯 합니다.
티크 원목으로 꾸며진 실내는 단정하고 깔끔합니다.
더운 철에도 비교적 지대가 높고 숲속에 있어 시원할 듯 하네요.
전시물은 크게 관심을 끄는 건 없네요.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윽하고 좋습디다.
지금은 미얀마 땅이 된 치앙뚱이 많이 아쉬운 듯 합니다.
우리가 간도를 생각하는 느낌일까요?
주변이 프랑스나 영국 식민지가 아니었더라면 영토를 지금보다 더 넓일 수도 있었을 듯 한데 당시 사정이 만만하지 않았죠.
어찌 보면 눈치껏 잘 처신을 한 것이 그 당시로는 최선이 아닌 가 싶어요.
공관 옆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네요.
높은 지대에 있지만 숲속이라 전망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꼭 가봐야 될 정도는 아니지만 깔끔한 정원이나 건물 그리고 한적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봐도 후회는 안 할 정도는 됩니다.
한국인에게 박정희처럼 태국 사람에게 호불호가 확실이 나뉜다는 피분송크람의 흔적도 느껴 보시구요.
'태국 치앙라이 정착 201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앙라이] 2월 둘째 주일 예배 (0) | 2019.02.10 |
---|---|
[치앙라이] 배 타고 루암밋으로 (0) | 2019.02.09 |
[치앙라이] 방앗간의 추억 (0) | 2019.02.04 |
[치앙라이] 2월 첫째 주일 예배 (0) | 2019.02.03 |
[치앙라이] 흑마늘 - 보물의 등장 (0) | 2019.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