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전 대갈 각하 시절이었어요.
그 때는 설을 못 쇠게 했죠.
설을 못 쇠게 한 것이 아니라 양력 1월 1일이 새해니 이 날을 설로 하라고.
그래도 대부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집에서는 음력으로 설에 제사를 지냈고 장손인 고로 연가를 내고 설을 쇠러 가곤 했습니다.
설날.
조용했습니다.
TV에서도 설 어쩌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죠.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제사를 지냈는데, 큰 아버지께서 언제 한가한 날에 할아버지 산소에 가 보자 하시더군요.
그래서 시간 약속을 했고 다시 서울에 왔습니다.
해서 간 성묘.
큰 집이 있던 남가좌동 모래내에서 가까운 가좌역에서 기차를 타고 파주에선가 내렸고 택시로 묘지에 갔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공원 묘지가 있었고 그곳에 기억 속으로는 한 번도 못 뵌 할아버지 산소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백일 무렵 할아버지 무릎에 놓여 찍은 가족 사진에서만 만났습니다.
묘가 있던 위쪽으로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서면 북한이 보인다고 하셨는데 올라가지는 않았어요.
묘비에는 ‘집사 방창현지묘’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그 글자가 중간이 아닌 약간 왼쪽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왔던 택시로 금촌 버스 정류장으로 와서 버스를 타고 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게 첫 번이자 마지막인 할아버지 산소 참배였습니다.
그 때 큰 어머니가 내가 물으셨습니다.
묘비에 누구 이름이 쓰여져 있더냐고.
사실대로 말씀 드렸더니 그러냐고.
그러면서 그 사연을 말해 주셨습니다.
내 친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 가셨습니다.
친할머니는 아들 두 형제와 딸 하나를 두셨는데, 셋 가운데 막내가 내 아버지.
또 다른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나는 친할머니가 돌아 가시고 들어 오셨나 했더니 살아 계실 때 들어 오셨다더군요.
씁쓸함.
아무튼 이 작은 할머니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고 친할머니가 돌아 가신 뒤로 오래 함께 사셨습니다.
묘를 쓸 때 작은 소동이 있었다 합니다.
작은 할머니 소생들은 할아버지와 함께 합장을 하기를 원했고 내 아버지와 본초 소생들은 당연하겠지만 반대를 했다네요.
그 중에서도 어려서 어머니를 여윈 내 아버지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합니다.
합장하면 내 어머니는 어디서 그 흔적을 찾냐고.
묘비를 주관했던 막내 작은 아버지가 묘비명을 준비했는데 결국 작은 할머니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게 82년인가 83년이니 벌써 35년 전입니다.
마침 지내게 된 곳이 할아버지 묘소와 가까운 곳이라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과연 있을까나?
네비를 찍고 가니 어렵지 않게 찾아 갈 수는 있었습니다.
입구에 있는 관리소에 가서 묘지 위치를 물으니 관리소 직원들이 죽었던 외할머니가 다시 살아 온 것만큼이나 반가워합니다.
어째 조짐이 이상하다 했더니 2011년부터 관리비가 밀렸다네요.
100만원이 살짝 넘는 돈입니다.
그런데 돈보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습니다.
작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할아버지 집을 물려 받았으니 책임지신다고 하셨거든요.
두 분 작은 아버지가 그러실 분들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지듯 묻는 괸리인과 함께 묘지로 가 봅니다.
근처에 가서도 정확한 위치를 못 찾단 관리인이 잠깐 물어 본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 쉽게 묘를 확인합니다.
할아버지는 맏손자인 내가 반가우셨나요?
그런데 묘비는 전에 왔을 때 보았던대로가 아니었습니다.
작은 할머니 이름이 함께 있더군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나에게 이런 말해 준 적이 없고 친할머니 자식은 모두 흙으로 돌아 가셨지만 내 몸 속에는 할머니 유전자도 있는데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이게 뭐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바도 아닙니다.
밀린 관리비를 어찌 할 것인지 계속 묻는 관리인에게 작은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서 해결하시도록 하겠다고 해 보지만 다들 그런답니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가면 또 끝이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그럼 내가 내랴?
이런 말이 속에서 나오려 하지만 이유를 알 필요도 없는 관리인에게 할 필요는 없었죠.
돌아 오는데 개운하질 않습니다.
내 친할머니 묘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큰아버지와 상의하셔서 화장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누가 관리하겠느냐 하는 마음에 그러셨다 하시더군요.
나도 추석 때 장암에 있는 할머니 묘에 성묘는 몇 번 가긴 했지만 나중 생각하니 잘 하신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우리 할머니가 아무 곳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잊혀진 우리 할머니 성함을 꺼내 기억하고자 합니다.
우리 할머니.
광산 김씨 김영희.
할머니 몸에서 내 아버지 윤갑씨가 나셨고 그 아버지가 날 세상에 나오게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영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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