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 백련산 자락에 명지학원에 속한 학교들이 있다.
명지재단 설립자이자 명지대학교 총장이었던 유상근 박사는 우리 집안이 터를 이루었던 부여 장암 출신이라 이리저리 인연이 깊었다.
할아버지는 유박사를 꽤 아꼈다고 하고 한때는 고모부가 이 재단에 고위직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니.
나도 이 재단과 인연이 있을 뻔한 적이 있어 근처에 온 김에 학교 구경을 해 보기로 했다.
명지대학교는 비교적 낮은 지대에 있었는데 전문대학과 중고교는 상당한 언덕 위에 있었다.
그 가운데 중고교를 보기로 했는데 학교 터는 언덕 위에 있어서 엄청난 옹벽이 시선을 막고 있었다.
친근감은 없고 위협적인 모습이다.
그 벽에는 졸업생이 어느 대학에 몇 명 들어 갔다는 걸개가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이런게 과연 필요한 가 싶은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이번 입시에서 배제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쉽다.
학교 교정 안은 그 위대한 코로나 덕에 당연히 못 들어간다.
입구에서 학교 모습을 잠시 바라다 보았다.
75년이었다.
전 해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고 얼마 안 되던 퇴직금이 자꾸 줄어드니 엄마는 굉장히 마음이 급하셨나 보다.
서둘러 서울 서대문구 모래내 시장 근처에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셨다.
그래서 중학교와 국민학교에 다니던 두 동생은 서울 근처 학교로 전학을 갔고, 그 해 3학년이 된 나도 고모부를 통해 명지고등학교로 전학 의뢰를 했던 모양이다.
오래 걸리지 않고 고3이라서 전학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연락을 받았다.
전학이 되었더라도 곤란한 점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는 시험을 통해 고등학교를 가던 때이었는데 명지고등학교는 일류나 이류는 절대 아니고 밑바닥에서 따져야 빠른 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딱지를 맞았으니.
ㅠㅠ
그리고 81년 8월
대학을 졸업하고 자연계 교원요원으로 군 복무를 6개월 마치고 돌아온 때였다.
신고하러 도 교육청에 가니 본인이 대학 선배이라고 한 장학사 왈 육개월 안에 발령이 어려우니 사립을 뚫어 보라고 했다.
그 때는 육개월 안에 발령이 안 나면 다시 군에 돌아 가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아무튼 몸이 단 나는 큰아버지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고모부를 통하여 명지중학교를 알아 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한 달 뒤, 충주공고에 근무하던 한 선생님이 건설회사로 가시게 되어 자리가 났고 내가 그 분을 대신하여 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고 그 당시에도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명지중학교와는 인연이 지워졌는데 나중에 들으니 꽤 많이 진행되었다고.
진행 과정의 일들은 상당히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라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을란다.
그때 그 선생님이 이직하지 않았으면 충주공고 교사 대신 명지중학교 교사가 되었을지도 모르니 세상 일이라는 게 참 묘한 면이 있다.
이제 그런 것들과는 관계과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혹 인연이 될 뻔 했던 학교 앞에 서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름만 들었지 명지 학교의 모습은 처음이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학생들과 교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사람들과 나는 무슨 관계일까?
옛적에도 인연이 없었고 지금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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