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 2022

[퀴타히아] 되에르 - 초기 크리스천을 흔적을 찾아서

정안군 2022. 5. 11. 23:42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자.  윗니 아랫니 닦자.

어머나.

이 노래가 일제강점기에 라디오 체조에 사용된 곡조에 한글 가사를 붙인 것이라네.

 

아무튼 둥근 해가 떴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하지만 잠은 벌써 깨어 있었다.

역시 알라 덕분이다.

꼭두새벽에 퍼지는 알라의 가르침이 내 잠을 멀리 쫓아 버렸다.

이런 때는 그저 야구 구경이 제일.

요즘 타격이 부진해서 애처롭지만 MLB 유일하게 매일 출전하는 샌디에이고 김하성 경기를 보기로 한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얘들은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에 이 나라에서는 새벽에 야구를 하는가.

김하성은 오늘도 안타를 때리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 팀이 이겼다.

 

괜찮은 호텔이라 아침 뷔페가 진수성찬이거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진수는 되었다.

터키는 가짓수만 다르지 종류는 비슷하다,

빵, 치즈류, 그리고 달걀, 오이와 토마토.

또 뭐가 있었나?

아, 벌집 통을 털었는지 벌집 채로 가져다 놓은 꿀이 있었네.

그건 정말 꿀맛이었어.

 

오늘은 아내 컨디션이 난조라 종일 휴식을 취한다고 해서 갈까 말까 망설였던 코스에 도전을 해 보기로 한다.

며칠 전 발견한 아마도 프리기아인들이 살던 골짜기라 Phrigian Valley라고 이름 붙은 곳이다.

이 지역은 꽤 오지라서 승용차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데 궁리를 해 보니 기차역이 있는 되에르(Doger)라는 곳에 가면 무슨 수가 날 것 같았다.

되에르는 지금 있는 퀴타히아에서 기차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아내는 택시를 잡아 타고 가라고 하지만 워낙 정보도 없고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라 이것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일단 가보고 무슨 수는 그다음에 써 보자고.

 

되에르는 파묵칼레 익스프레스를 타고 가면 된다.

12시 10분 출발에 1시 3분 도착이다.

기차를 탈 무렵 멀리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는데 설마 이쪽으로는 안 오겠지.

아침에는 둥근 해가 번쩍 뜨기도 했는데.

그런데 불길한 예감은 틀림없이 맞게 되어 있다.

 

비가 내린다.

봄비가 내린다.

 

갑자기 이은하 언니가 부른 봄비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을까.

봄비 따라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

그때 그날은 그때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곳에 나를 내려놓고 기차는 떠났다.

철길 건너 소나무가 참 멋있었는데 오늘은 내 처지가 그런 걸 말할 처지가 아니다.

대여섯 사람이 내렸는데 다들 마중 나온 사람을 따라 승용차를 타고 사라지고 남은 사람은 나와 나보다 조금 더 낡은 할배 한 사람.

옛날 방영했던 봄비의 주인공 이정길.

드라마가 종영되던 방송에서 비를 쫄쫄 맞던 이정길이 꽤 초라하고 불쌍하게 보였는데 오늘은 내가 그 꼴이라 그 봄비가 생각났나 보다.

역 승무원도 사무실도 들어간 다음 비가 좀 약해지는 걸 기다리다 할배가 먼저 비 속으로 들어간다.

이거야 원.

처량하게 혼자 남아 있을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나도 비속으로.

다행히 쏟아붓는 비는 아니라지만 옷이 젖기는 마찬가지.

 

쥐 죽은 듯 조용한 역사를 뒤로 하고 제법 떨어진 동네를 향해 비속을 터벅터벅 걸어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콘크리트 길 여기저기 빗물이 고여 발을 아무 곳이나 디딜 수도 없다.

이쯤에서였나, 개 한 마리가 나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생기기는 전형적인 변견이었는데 그래도 초행길을 가이드해 주겠다고 나선 개를 보니 내가 개복은 있나 싶었다.

원래 여기에 올 때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택시가 보이면 교섭을 해서 네 군데 정도 타고 도는 것이 첫 번째 안이고 없으면 역에서 3km 정도 떨어진 초기 크리스천 흔적까지 걸어서 왕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택시는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 걸어서 갔다 오는 걸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비가 와서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비는 알라가 물조리개로 조절을 하며 뿌려대는지 강약 중간 약으로 리듬을 탔다.

목표로 한 곳은 Asar Kalesi.

이곳을 가려면 크지 않은 되에르를 가로질러가야 하는데 반쯤 왔나.

비는 그치지 않고 점점 거세지고 더구나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하늘이 새카맣다.

그래 인샬라이다.

인샬라의 나라에 왔으니.

 

이쯤이었다.

예니 자미라는 곳.

새로 지었나 보다.

빈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또 버스 승차장인지 빈 박스 모양 간이 건물 안에서 있기도 했는데 검은 차도르를 쓴 여학생 세 명이 지나가면서 나를 계속 슬쩍슬쩍 보더라.

어떤 동아시아 사람이 우리 동네에 와서 날궂이 하는 모양이라고.

비가 다시 누그러져서 식당도 있고 찻집도 있는 중심가 쪽으로 이동을 하는 데 있을 건 다 있다.

마트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고.

 

목욕 시설 하맘이었나 보다.

모양이 딱 그 스타일인데 지금은 그 기능을 멈춘 듯.

터키는 지금보다 오스만 시절이 더 도시 기능이 나았던 모양이다.

 

 

식당이 두서너 곳 있었는데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냥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갔다.

젊은 부부가 하는 식당이었는데 내가 들어가니 기대 반 당황 반.

메뉴판도 있기는 했다.

토스트와 타북 초르바를 시켰는데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친구도 나도 인터넷이 안 되니 글을 써서 보여 주어 간신히 정도.

토스트는 나와서 먹었는데 초르바는 영.

왜 안 주냐고 물으니 타북 초르바가 없단다.

그러더니 번역기를 돌려 보여 주는데 렌틸콩 수프가 된다네.

비가 더욱 세게 내려 갈 곳도 없고 갈 수도 없으니 먹기나 해야지.

그래서 가져와 처음 먹어 보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렌틸콩은 병아리콩이라고 하는 친구 아닌가?

 

이제 다 먹고 45리라를 계산하여 주었는데 비는 세차게 내린다.

비가 그칠까?

주인에게 물으니 타맘이란다.

걱정 말라고.

한참을 쏟아붓더니 좀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마지막 구경 카드인 이 동네 캐라반 숙소를 구경해야겠다.

그 캐라반 숙소는 식당에서 멀지 않은 광장에 있었다.

 

그 규모가 엄청났다.

물론 지금은 그냥 빈 건물로 남아 있었는데 관리는 그냥저냥 되는 모양.

아주 지저분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이 캐라반 숙소 이곳 말로 Kerban saray인데 오스만 제국 무라트 2세(1421 - 1451) 시절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낙타를 위한 공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카라반을 위한 숙소였다.

터키 안에는 이런 Kerban saray가 곳곳에 많은데 호텔로 개조해 잘 쓰는 곳이 있고 여기처럼 그냥 방치해 놓는 경우도 흔히 있단다.

엄청난 건물이 이런 촌구석에 있는 것도 놀랍고 그 시절 카라반을 위해 이런 거대 건물을 지어준 제국의 힘도 놀랍다.

 

Kerban saray 앞 광장이다.

 

그 건너는 당연히 자미.

이 근처가 지금이나 옛날이다 되에르의 중심가.

자미 이름은 차아시(Carsi).

ES 중심가 지명이기도 했다.

이제 뭐하나.

비는 약해지긴 했지만 계속 내리고 있고 이제 갈 데도 없으니.

별 수 있나 그냥 역으로 돌아가야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지만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일단 역에서 대기하기로.

 

역으로 돌아가는 길.

전형적인 농촌 풍경.

누가 아니랄까 봐 소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가끔 얼굴을 마주 치면 인사를 건넨다.

물론 남자만 그렇고 여자들은 종종걸음으로 어딘가 가기 바쁘다.

역시 농촌은 이슬람 전통이 굳게 살아 있는 곳이다.

 

돌아오는 주변에 이런 풍경이 있었다.

사는 사람이야 어떨지 몰라도 보는 사람에게는 옛날 정서를 되살려 주는.

정말 풍경화가 따로 없었다.

모네의 그림들을 연속해서 보는 듯한.

 

역에는 사무실에서 사람 소리가 날 뿐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비에 젖어 좀 추웠는데 그래도 다행히 대합실이 있어 그 안에서 머무를 수가 있었다.

대략 50분 정도를 기다렸는데 기차 시간이 되니 승용차로 몇 사람이 오긴 했다.

출발 시간 30분 전 비가 완전히 그쳤다.

정말 야속한 비.

그리고 정시에 도착한 기차.

이곳에서는 표를 팔지 않고 기차를 타면 승무원이 와서 돈을 받고 표를 내준다.

여권이나 그런 것은 보자 소리도 안 한다.

 

되에르.

다시 찾을 일이 없을 동네.

비록 비로 인해 크리스천의 흔적이 있는 곳을 갈 수 없었지만 그 하늘 그 산하를 보았으면 되었지 않을까?

믿음은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