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 2022

[셀추크] 사도 요한 교회와 아야술룩 성채

정안군 2022. 5. 30. 02:18

주일 예배 후 김 장로님의 차를 함께 타고 셀추크로 왔다.

김 장로님은 셀추크에서 에베소 빌라 한국식당을 운영하시고 이즈미르 한인회 회장을 맡아 수고하시는 분이다.

요즘은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관 사업을 위해 불철주야로 힘쓰시며 활동하는 중이다.

아무쪼록 사업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기를 빌어 본다.

식사도 함께 하고 장로님 부부와 함께 이곳에서의 애환을 함께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도 태국에서 잠시 동안이지만 식당을 운영해 본 적이 있어서 많은 부분이 공감이 갔다.

결론은 남 나라에서 돈 벌어먹기가 쉬운 게 아니다.

본래는 셀추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해안 도시 쿠사다시(Kusadasi)를 가서 바다 구경을 하려고 온 것인데 아내의 반대에 막혀 급거 목적지를 수정했다.

셀추크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도 요한 교회를 방문하기로.

 

가는 도중에 만난 이상한 유적지.

개방이 되어 있지 않고 안내판이나 하다 못해 구글맵에도 나오지 않아 도대체 정체가 뭔지를 알 수 없던.

철망으로 둘러 쌓여 있었으나 강아지 수준이 아닌 소구멍이 뚫려 있어 출입은 자유로운 편이다.

옛날 주거지일까 아님 소님이나 양님들의 주거지였을까?

 

셀추크는 건축이나 개발이 엄격하게 제한이 되어 시내가 비교적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예쁘게 가꾼 곳도 있고 그냥 그대로인 곳도 있고.

아무튼 걷기에 좋은 길이다.

그리고 다행히 이 날은 해님이 구름과 숨바꼭질하고 계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사베이 자미이다.

여기도 제법 오랜 세월을 보냈는데 한참 발굴 조사 중인지 뒤쪽은 좀 어수선하였다.

오래되었든 아니든 자미는 공짜인데 오래된 교회는 입장료를 받는 터키.

 

사도 요한 교회를 품은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딱 봐도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진 것을 알겠다.

 

알파슬란 자미.

성문 입구에 마치 보초를 서 듯 있는 예쁘장한 자미.

폼이 정교회 건물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유일한 성문.

일명 박해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박해의 문(Persecution Gate)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 문을 장식하던 장식 조각 때문이란다.

이 장식 조각에는 여장을 하고 숨어 있는 아킬레우스를 찾기 위해 스키로스 섬의 궁전에 온 오디세우스와 그의 일행이 무장을 한 채 여인들 사이에 서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리스도교의 박해 장면으로 잘못 해석한 사람들이 이 문을 ‘박해의 문’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결국 기독교 박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인데 여기에 관련된 블로그에는 잘못된 정보가 있는 것도 있다.

이 장식은 19세기에 영국 Wobuck 수도원 갤러리로 옮겨져 지금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성문 오른편에는 도시를 이루었던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다.

벽과 기둥들.

 

여기서 사람들이 살고 죽었다.

입장료 40리라.

 

사도 요한 교회 터이다.

많은 기둥들이 아래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왔단다.

사도행전 19장 24절에서 28절까지 흥미 있는 내용이 있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 색이 나오는데 이 친구는 바울의 전도에 의해 자기 밥줄이 위협을 받자 사람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이곳 에베소는 위대한 아르테미스의 도시인데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 같은 놈들이 그걸 부정하고 있다고.

서기장은 우리 에베소가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도시인 건 누구나 다 아는 소리인데 왜 그런 걸로 소동을 일으키느냐고 설득을 하여 사람들을 진정시키기도 한다.

결국 나중에 그 아르테미스가 예수에게 져서 자기 집이 모두 털려 나갔다.

 

교회 터에는 이런 십자가 부조가 참 많았다.

 

교회 입구이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이 언덕의 꼭대기에 움막을 짓고 은둔하면서 요한복음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죽으면 이 언덕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이런 까닭으로 일찍부터 이 언덕은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곳이 되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첫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지은 바실리카 형식의 거대한 교회로 대체되었다.

이 교회는 전형적인 그리스 정교회의 십자가 모양의 건물로, 길이 130m에 여섯 개의 돔을 가진 웅장한 건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폐허는 바로 이 두 번째 교회의 잔해다.

이 교회가 지어지던 시기에 사람들은 옛 에베소를 버리고 이 언덕으로 이주했다.

한 동안 이 교회는 에베소의 대성당으로 번영했다.

비잔틴 제국 시절에는 사도 요한을 경배하기 위해 제국 곳곳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줄을 이었다.

14세기 지진이 교회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상 구글맵에서 발취)

 

사도 요한의 무덤.

가톨릭은 기독교 국교 전 로마 시대의 수호신을 수호성인으로 만들었다.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가 신을 따로 둘 수 없으니 성인 호칭을 이용해서 순교자이거나 공이 많은 사람을 성자로 삼아 그동안 관습처럼 썼던 수호신을 대치한 것이었다.

여기는 성 요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나 나는 개신교 방식에 따라 사도 요한으로 표기를 한다.

진짜 사도 요한의 무덤인가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여기서 살았고 여기에 묻어 달라는 유언이 전하여 내려오는 것으로 이곳을 진짜 무덤으로 삼아 그 후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다.

예수의 직계 제자의 한 사람이자 사랑을 듬뿍 받았던 사도 요한.

그는 요한 서신을 통해 기독교 본질을 뜻하는 귀한 구절을 우리에게 남겼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구절은 각 나라 말로 바뀐 채로 많은 교회에 붙어 있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 1 4 : 7 - 8)

 

성채 쪽으로 움직이면서 내려다본 교회 터.

세례를 베풀던 장소도 있었으나 필리핀에서 온 순례단이 선점을 하고 있어 사진에 담지 못했다.

이 동네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들만 보다가 필리핀 사람을 보니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이들이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한 말.

안녕하세요.

가톨릭 순례단이라 한다.

 

언덕 위로 마치 왕관처럼 보이는 성채가 나타났다.

아야술룩(Ayasuluk) 성채이다.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진 성인 듯.

이곳에서 에페소스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성은 리디아 왕과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를 거쳐 번영했으나 휘하 장군이 지금 에베소 지역으로 도시 이전을 하였다가 비잔틴 시대에 다시 이 지역으로 옮겨 왔다 한다.

이 시기에 제국은 이미 쇠퇴했고 지진으로 교회는 폐허가 되었으나 번영의 원천이던 바다는 멀리 물러나 있어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언덕과 교회를 버리고 떠나가고 도시는 조그만 마을로 전락했다.

1914년, 마을의 이름이 아야술룩에서 셀죽으로 바뀌었고, 1923년에는 그리스와 터키의 대규모 주민 교환 조치로 마지막까지 이 언덕에 살던 그리스인들마저 떠났다.

(구글맵에서 일부 발취)

 

성채에서 보이는 넓은 들.

 

성채로 들어서는 문을 거치자 경사가 급한 자갈길이 이어진다.

높은 장소에는 늘 보이는 터키 국기가 여기도 예외 없이 있었다.

옛날에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내 것이라는 나와바리 표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정체모를 건물.

자미였을까 아님 예배당이었을까?

아님 예배당에서 자미로 변신하였다가 폐허가 되었을까?

 

어디든 높은 곳에는 반드시 올라야 한다는 것은 여행자들의 진리.

올라 와 보니 역시 그 말이 맞다.

 

지금은 그냥 거대하고 엄청나다는 말만 나오나 이걸 쌓을 때 쌓은 사람들은 얼마나 뺑이 쳤을고.

 

이사베이 자미 너머로 기둥 하나만 보이는 아르테미스 신전 터가 보인다.

저것도 주변에 흩어져 있던 돌들을 맞춰 세운 것이라고.

7대 불가사의에 속했다던 신전.

기둥이 무려 127개나 된 엄청난 규모였단다.

허나 어떤 미친놈이 불을 질러 파괴가 되었고 그 뒤 기둥들과 자재는 사도 요한 교회로 옮겨져 재 사용되었고 또 아주 일부는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에 스카우트되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증축된 예배당은 이런 모습이었단다.

흔히 보는 바실리카 양식이 아니라 좀 생경하지만 어쨌든 십자가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처음에는 예배당은 이런 모습이었다가 후에 서유럽에서 고딕 양식으로 바뀌면서 그 양식이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어 다시 사진에 담았다.

요한 선생님 우리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셀추크 이즈반 역으로 가던 도중 만난 기념품 숍.

돈을 위해 모델로 나선 성모 마리아와 예수.

이나마 터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즈미르 사도 요한 가톨릭 교회가 요새화 된 것을 보면.

그나마 여기 사도 요한은 이즈미르보다 대접을 잘 받고 계신 듯.

 

터키 남자들 수염처럼 덩굴이 건물을 감쌌다.

 

셀추크 시내를 관통하는 수도교.

정말이지 셀추크는 도시 전체가 유적이었다.

 

바울과 요한이 살았던 도시 셀추크.

몇 번을 다시 와도 좋을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