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충주 이야기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남산에 서다

정안군 2006. 2. 22. 10:49

 

오늘은 봄 날보다 더 봄 날 같은 날이었습니다.   사실 진짜 봄 날은 오전에는 멀쩡하다가도 오후가 되면 바람이 장난이 아니게 불어 야외 활동하기에는 좀 그렇지요.

 

그렇지만 겨울에 생각하는 봄은 그런 것들은 모두 빼고 생각하게 되니 따뜻하고 심숭생숭한 느낌만 들게 되나 봅니다.

 

아무튼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바깥 세상의 유혹이 너무 강하군요.

 

오늘은 남산에 가보기로 합니다.   가면서 잠시 갈등.   오늘은 어떤 코스를 선택할까 ?

 

그래 좀 걷지.   샘골로 올라가서 정상에 선 다음 마지막재로 내려 오기로 합니다.   충일교회 입구에 자전차를 주차한 다음 사과 나무 밭 사이길로 오르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온통 과수원이었었는데 이곳도 주택지가 점점 늘어나 풍치가 예전만 못합니다.

 

 

 

산불 조심기가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는 마지막재와 정상 갈림길에 섰습니다.   역시 북사면은 아직도 눈이 남아 있군요.   무너져 내린 남산성을 보수하다가 겨울을 그냥 보냈는지 무너진 성도 사람의 손길이 다가 올 봄을 기다리고 있군요.

 

 

충주산성(일명 남산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는 곳인데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 번 읽어 보라고 서 있겠지만 이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   옆으로 남산성이 이어지는군요.

 

 

정상에 있는 삼각점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삼각점은 우리나라 측량 기준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일제 시대 때 일본 아자씨들이 우리 나라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우리 나라 정기를 없앨라고 했다는 전설이 아직도 여기 저기에서 들려 오는데 아마도 이 삼각점을 설치하는 작업을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 아닌 가 합니다.   삼각점은 주위가 잘 보이는 봉우리에 설치를 해야 한는데 이 봉우리들이 대개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거든요.

 

참고로 그 당시 일본은 서양의 과학을 맹신하다시피 했고 동양의 전통 사상을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일본 아자씨들이 동양의 사상일 수도 있는 정기를 빼앗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 ???

 

좀 생각이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남산 정상에는 이렇게 넗은 터가 있어서 옛날 외적이 쳐들어와 농성이 필요한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거 활동하는데 충분한 공간을 제공했지요.   그리고 좀 아래에는 식수용 저수지까지 있어서 장기 농성에는 적당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요.

 

남산성 동문 부근입니다.   이곳에서 마지막재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서 이리로 갈려고 했는데 응달이어서 눈이 그대로 남아 있네요.   상당히 미끄러워서 이 길로 내려 가는 것은 그만두고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갑니다.

 

 

 

산성은 군데 군데 무너져 내린 곳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도 전망이 좋아서 성터로는 아주 좋은 곳임을 알 수가 있지요.

 

남산성 북쪽 기슭입니다.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곳은 여전히 겨울이네요.   그래도 그래봐야 몇 일이겠지요.   봄 햇살에 남은 눈이 그야말로 눈 녹듯이 없어질 날이 멀지 않았네요.

 

 

마지막재로 이어지는 길은 이렇게 임도와 등산로가 서로 엇갈리면서 이어집니다.  

 

한 쌍의 남녀가 제 앞에 가는데 좀 느낌이 이상하군요.   부부는 아닌 듯 합니다.   남자는 멋적어 하면서 20 m 좀 앞서서 가고 여저는 부끄럼 모드로 그 뒤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내려 가네요.

 

군데 군데 얼음길이 있어서 미끄러운 곳도 있는데 남자는 용감하게 먼저 지나간 다음 숨은 듯이 그 여자가 내려 오는 것을 기다립니다.

 

느낌은 첫 선을 본 과부와 홀아비가 아닌가 싶은데.   글세 올시다.   사실 그렇다면 미끄러운 곳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좀 도와주면 훌륭한 결과가 나올 듯 한데.

 

흠 !!!!  세상 사는 방법이나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니 뭐라고 말하기가 그러네요. 

 

 

다 내려 왔군요.   이 비는 6.25 때 전사한 전몰자 공덕비입니다.   그 건너에는 몽골 항전비가 서 있는데 역사책에 나오는 대로 고려 시대 몽골군이 처들어 왔을 때 승병장 김윤휴가 처용성에서 승리하고 또 충주산성에서도 몽골군을 물리쳤다는 그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 그 승전 장소는 확실치가 않은가 봅니다.

 

그 당시 김윤휴는 많은 노비들에게 이기면 너희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가 승리했다고 전해지는데 역시 노비라는 멍애는 목숨을 걸고라도 벗어나고 싶을 만큼 힘들고 한이 맺히는 것인가 봅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전해지는 노비들의 한과 더불어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게 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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