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장릉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다시 네이버 지식인 선생님에게 장릉에 대해 물어 볼까요 ?
장릉(莊陵)
위치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특징 : 조선 제6대왕인 단종이 영월로 유배와 죽은 뒤, 호장 엄흥도가 죽음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모신 곳이다. 장릉은 영월의 상징적 존재로 여러 이적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개요 : 소나기재에서 영월읍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장릉은 조선 제6대왕인 단종의 능이다. 단종을 현재 이곳에 모시게 된 데는 호장(아전) 엄흥도(嚴興道)의 역할이 매우 컸다.
세조에 의해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
이 유(瑜)가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서인으로 강봉되었다. 단종이 영월 오던 해, 여름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단종은 청령포에서 영월
읍내의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한 계속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같은 해 10월, 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내려보냈다.
단종은 사약을 마시고 죽임을 당했다. 그때 단종의 나이는 17세. 단종은 세조의 명에 의해 동강에 버려졌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당시 세조의 서슬이 시퍼래서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영월에서 행정 업무를 보좌하는 호장 엄흥도는 아들 삼형제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야밤을 틈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산
(지금의 장릉)에 모셨다.
이후 단종은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1698년 복위되었다. 단종을 모신 능에
장릉(莊陵)이란 능호(陵號)를 부여했다.
장릉에는 특이하게 문관석이 두 개 있을 뿐, 무관석은 없다. 단종 복위와 얽혀 목숨을 잃은 이만
해도 200여 명. 생전에 그 무수한 죽음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단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릉은 여느 왕릉과 달리 단종에게
죽음으로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
장릉의 홍살문을 들어서면 배식단(配食壇), 객사, 충신각
등이 보이고 영천(靈泉)이 나온다. 이 우물은 한식날 장릉에 제사를 올릴 때면 물이 많이 고이는데 단종의 한이 맺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정자각에서 떼를 입힌 능선 허리를 오르면 장릉이 눈에 들어온다.
단종이 승하한 뒤 단종에 관한 신비한 여러
이야깃거리가 전한다. 그중 최근에 있었던 홍모씨의 일화가 유명하다. 불치병을 앓고 있던 그는 장릉을 매일 참배하면서 정성을 다해 장릉을
보살폈다. 그 덕분인지 병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규석광산을 발견해 부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장릉 입구는 엄대현군수가 세운 비석이
있는데 그 비용은 홍씨가 댔다고 한다. 그는 매일 장릉을 찾는다고 한다. 이밖에도 단종께 치성을 다한 이들에게 단종이 꿈에 나타나거나 소원을
이루었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장릉에 들어서니 능까지 가는 길이 좀 달라졌네요. 민속박물관 옆 소나무 능선쪽으로 길이 잘 나 있습니다. 평이한 길이긴 하지만 노인들에게는 힘든 길이겠네요. 소나무 숲 사이 샛길로 가니 무덤이 나타납니다.
두번째 오는 것인데 이렇게 가까이는 처음입니다. 전에는 충신각이 있는 곳까지 왔었거든요.
TV 시대극의 좋은 소재를 제공했던 단종이 바로 여기서 잠들고 있습니다.
한명회와 신숙주, 그리고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 역사의 선택길에서 다른 쪽에 섰던 사람들,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재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어진 왕이었으나 병약해서 일찍 죽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단종은 나이 어린 탓에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지요. 사실 문종 때부터 약해진 왕권은 단종에 이르러 김종서와 황보인 등 원로대신들에 의해서 상당히 잠식되어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족의 원성은 점점 더 높아가게 됩니다.
결국 수양대군은 왕권 강화라는 왕족들의 뒷배경으로 단종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고 왕권을 위협하던 원로급들을 숙청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결과로 강력한 왕권을 다시 확립하게 되지만 결국 그 뒤를 따른 왕들은 신하들의 권력에 눌리어 점점 더 쇠약하여지다가 조선 말기에는 왕 옹립까지 신하들의 흥정거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모든 왕조의 창업자인 왕이나 황제는 강력한 능력의 소유자이지만 대대로 이어지면서 쓸만한 왕자들은 그 뜻을 펴보기도 전에 신하들의 손에 의해 제거 당하고 무능력한 왕자만 남겨져서 대를 이어가게 되는 것이 모든 왕조의 흥망 순서가 되는 셈입니다.
단종은 결국 왕권 강화를 위한 희생양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양녕대군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찬성하지 않습니까 ?
"아니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데 우리 이씨들의 나라가 아닌가 ? 감히 그 놈들이 누군데 이토록 우리들을 무시하는 것인가 ?"
그 당시 이씨 왕족들이 원로 대신들에게 했던 말이라죠 ? 그러고 보니 대통령 재수를 하고도 성공을 하지 못한 이X창 옹이 그 당시에 했다던 말이 생각나네요. 조금 뉘앙스를 바꾸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
"아니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데 우리 메인 스트림(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해석하면 주류)들의 나라가 아닌가 ? 감히 그 놈들이 누군데(그나마 그 대표자는 똥통대학도 아니고 고졸 출신이라며) 이토록 우리들을 무시하는 것인가 ?"
그런데 더욱 코메디는 메인 스트림은 관두고 그 곁가지 실개천도 못되는 사람들도 자기가 메인 스트림쯤 되는 줄 알고 고졸 출신 대통령이라고 삭 무시해 댄다는 것 아닙니까 ?
그거야 말로 누워서 침뱉기인줄도 모르고요...
허나 세월 앞에 모든 것은 다 헛것입니다. 왕위도 영의정이나 그 좋은 자리도 세월 앞에는 모두 허상인게지요.
그저 따뜻한 봄 빛만이 세상은 너희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고 바로 내가 주인공이란다 라고 말해주는 것 같네요.
그 전에 왔었을 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시내였습니다. 참 맑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참 맑네요. 본래 세상은 맑은 것일진데...
혹시 그 유명한 사육신들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
왕에 대해 반역을 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그 삼족 처형에 의해 성삼문의 경우, 아버지도 직접 가담했으니 당연히 사형, 형제 3명과 아들들, 조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4촌형제까지는 처벌되지 않았답니다.
여자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는데 세조가 왕이 되는데 협조한 공신들에게 배분되었습니다.
박팽년의 경우, 역시 남자는 모두 죽었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데 박팽년의 며느리도 대구감영의 관노가 되었는데 임신을 하고 있었으므로, 왕명이 내리기를 아기가 태어나면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면 관노로 삼으라고 했는데 나중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원래 박팽년 집안의 노비였던 여자도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낳아서 서로 바꾸어서 박팽년의 자손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팽년의 어린 손자는 종의 아들로 지내다가 성종때가 되어서 사육신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신분이 들어나게 되었는데 성종이 노비의 신분을 면제하여 살게 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연좌제인 셈인데 실권이 있든 없든 왕의 자리가 좋긴 좋았나 봅니다. 왠만해서는 감히 왕 자리를 노릴 엄두도 못낼 정도로 엄벌에 처한 것을 보니.
그러나 사실 왕위를 노리지 못하게 한 것은 찬탈은 왕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밑에 붙어 있던 신하들이 자기의 권력을 대대로 누리기 위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왕을 오래 오래 이용해 먹을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옆나라 일본의 경우처럼요...
어쨌든 꽃잎이 떨어지며 봄 날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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